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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The Time of Waiting - 이지수>

맑은날T 2007. 11. 9. 17:35

      국화가 피었다는 편지

                                   임태주

     가을해가 풀썩 떨어집니다
     꽃살무늬 방문이 해 그림자에 갇힙니다
     몇 줄 편지를 쓰다 지우고 여자는
     돌아앉아 다시 뜨개질을 합니다
     담장 기와 위에 핀 바위솔꽃이
     설핏설핏 여자의 눈을 밟고 지나갑니다
     뒤란의 머위잎 몇 장을 오래 앉아 뜯습니다
     희미한 초생달이 돋습니다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는 손톱 끝에서

     詩는 사랑하는 일보다 더 외로운 일이라는데....

     억새를 흔들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여자는 잔별들 사이로 燈을 꽂습니다
     가지런히 빗질을 하고
     一生의 거울 속에서 여자는
     그림자로 남아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씁니다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지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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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깊으면,
아무래도 애를 써도,
다른 일에 관심을 던져 보아도,
익숙해지지는 않나 봅니다.
설령 기다림이 습관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림의 막막함과
기다림의 하염없음과
기다림의 느림은
어쩌지 못하나 봅니다.
여인은
노오란 山菊이 피면  만날 언약을 한 님이 있나 봅니다.
지금 그 님을 기다리나 봅니다.

지난 늦은 봄,
한숨 포옥~ 나오는 그리움을 달래려...
뒤란 장독대에 붉게 핀 봉숭아 꽃 잎을 하나 둘 따서
손톱마다 곱게 싸매어 물을 들였습니다.
봉숭아 물이 다 빠지기 전에 님이 오리라...
봉숭아 물이 다 빠지기 전에 님을 보리라...

손톱이 자라서 봉숭아물은 초생달로 희미해지는데,
지난 밤 무서리에 山菊이 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머위 잎을 아무리 천천히 뜯어보아도
님은 아직 오지 않습니다.

山菊이 피었다는 소식을 적었다 가만히 지웁니다.
내년... 山菊이 필 무렵에 님이 오실 것이라 믿으니까요.
山菊이 피었단 편지는 내년에나 적어야 할 소식이니까요..
편지를 보내놓고 내년까지 기다리기는 너무 힘이 드.니.까.요..

                                                         2007.11.09  맑은날
 

 [The Time of Waiting - 이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