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의 아빠
그 아저씨(1) 홀아비바람꽃>
맑은날T
2002. 1. 30. 16:17
어제 퇴근길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 열두시가 다 된 시각, 아파트 단지는 밤 늦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 몇 명만 보이고, 꽤나 한산하고 쓸쓸한 겨울밤의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동 입구를 들어서면 엘리베이트 바로 옆에 경비실이 있다.
지나치면서 경비실을 쳐다보니, '그 아저씨'께서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졸고 계신다.
엘리베이트 버튼을 누른 다음 다시 경비실로 눈길을 준다.
작은 형광등이 하나 켜져 있는 경비실은 작은 형광등으로는 어둠을 다 물리치지 못하는지,
아니면 모기장 같은 철망이 창을 가리고 있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야간 경비일이란 타고난
고단함이 시각적으로 보여서인지 항상 어두침침해 보이고, 그래서 숙직근무를 하는 경비아저씨의
얼굴은 곱절로 노곤해보인다.
우리 동네 경비실에는 경비아저씨 두 분이 교대로 근무하고 계신다.
한 분은 몸이 다소 뚱뚱하고 사람 좋은 얼굴로 항상 먼저 인사를 하고 활기가 넘쳐보여서
참 좋다.
오가다 마주치면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네주시고 그래서 인기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4년째 근무하시는 쉰 살 가량의 베테랑이시다.
또 다른 '그 아저씨'는 길죽한 얼굴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다.
광대뼈가 도드라져보이는 건 광대뼈가 선천적으로 튀어나와서라기 얼굴에 살이 홀쭉하니 빠져서
그런 듯하다.
'그 아저씨'는 작년 8월에 새로 오셨는데, 아마도 경비일을 하신 지 얼마 되지 않는 눈치이다.
마주치면 얼굴을 알아보시고는 눈웃음을 멋적게 지으실 뿐이다.
특별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오신 분이란 걸 알고 있다.
작년 9월경인가, 아파트 화단과 길가에 난 잡초를 기계가 아닌 낫을 이용하여 베어내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낫놀림과 닦아낸(우리 고향에서는 풀을 베어내는 걸 닦는다고 한다) 깔끔함이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파트 앞에 놓여진 화분과 고추 몇 그루를 끔찍이도 아껴 키우셨다.
'그 아저씨'는 예순 전후로 보이는데 농촌 어른들이 다 그렇듯 실제 나이는 쉰 정도 되었을 것이다.
두 아저씨 중 '그 아저씨'는 유독 밤잠이 많은 듯 보였다.
늦은 퇴근 시간에 경비실을 보면 '그 아저씨'는 대부분 피곤에 못 이겨 졸고 계셨다.
'그 아저씨'가 그렇게도 피곤에 못이겨 하시는 이유는 오랜 농촌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사실 농촌에 계시는 대부분의 어른들은 9시 뉴스를 보는 일이 별로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녁 8시 정도가 되면 모두 잠자리를 들게 된다.
그런 생활습관에 길들여진 '그 아저씨'의 야간경비는 어쩌면 가장 바쁜 농번기의 농촌생활
이상으로 고달픈 일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호들갑스런 아파트 주민으로부터 몇 번쯤은 질타를 받았을 것이고, '그 아저씨'
스스로도 월급을 받고 근무하면서 졸면 안된다는 순박한 의무감과 그럼에도 밀려오는 눈거풀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미안함으로 더욱 힘들어하실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야간근무의 고달픔보다 의무를 제대로 못한다는 데서 오는 눈치가 아마도 더
힘드실 것이다.
그래서 인지 뚱뚱한 아저씨가 졸고 있는 모습은 약간은 태평스러워 보이는데, '그 아저씨'의 조는
모습은 살랑 부는 미풍에도 금새 잠을 깰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져 지나치는 발걸음을 더욱
조심하게 된다.
엘리베이트가 내려오고 문이 열릴 때가 되자 긴장이 된다.
엘리베이트가 낡아서 설 때와 문이 열릴 때 소음이 심한 편이기 때문이다.
1층에 엘리베이트가 서고, 문이 덜컹 열린다.
슬쩍 쳐다보니 그 아저씨는 엘리베이트 소리에 잠이 깨신 듯 하나, 눈이 쉽사리 떠져지지
않는 듯, 이마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엘리베이트에 올랐다.
엘리베이트가 덜컹하더니 올라가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트를 따라 기억도 거슬러 올라가면서 방금 보았던 '그 아저씨'의 고단한 얼굴에
또 하나의 표정이 겹쳐진다.
기억 속에서 한없이 쓸쓸한 그 표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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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아비 바람꽃입니다.
칼럼 58호에 올린 꿩의바람꽃과 같이 바람꽃의 한 종류입니다.
강원도 지방에서 자라는 다년초이고 꽃은 백색이며 5~6월에 핍니다.
바람꽃이 아네모네란 거 아시죠?
2002. 1. 30 맑은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