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그렇구나

행라면 드셔보셨어요?

맑은날T 2008. 9. 2. 13:36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1987년 초, 서울 마포구 망원동이다.

그러니까, 군대에서 작대기 하나 달고 죽어라 뛰고 또 뛰고 하던 그때 일이다.

수방사에 신병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은 겨울 어느 토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다.


제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말년병장은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아주 심심해 죽을라고 한다.

내무반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주황색 체육복을 입고 손 하나를 사타구니에 집어 넣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소일한다.

점심 때면 따로 사제라면(군용은 오뚜기 라면이나 청보라면)을 사다가 지들끼리 끓여 먹곤 한다.


점심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을 때다.

사타구니 긁적이며 배회하던 말년병장 한 명이 죽어라고 고참 전투화를 닦던 나를 보더니

비시시 웃으며 부.른.다.


"어이~ 맑은날~"

"이병  맑.은.날" (그때도 지금처럼 복명 복창은 참 잘했다.)

"전투화 냅두고 저기 밖에 나가서 라면 좀 사 갖고와."


자대에 배치받아서 제일 부러워보이던 심부름이 부대 밖에 라면사러 가는 심부름이었는데,

대부분 작대기 2개 이상짜리만 그 심부름을 할 특권을 가졌다.

밖에 나가면, 보름달 빵을 하나 사서 먹을 시간도 되고, 무엇보다도 '사제공기'(이런 게 있기나 한지 모르지만..)를 마실 수 있어서 부러워 하는 심부름이다.


천원짜리 하나 받아들고 물어본다.


"김병장님, 라면은 어떤 것을 사가지고 옵니까?"

"행라면...음...요즘 한창 광고나오는 건데..한문으로 한 글자 쓴 라면이야."

"넵, 행라면 2개 사가지고 오겠습니다. 충성!"

"탈영하지 말고 동전이 넘어지기 전에 다녀와라잉..."


그러면서 100원짜리 동전을 팽그르르 돌린다.


돈을 받아 들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행라면을 사러  200미터 남짓 떨어진 가게로 냅다 달려간다.


"아줌마!  여기 행라면 2개하고 보름달 빵 3개랑 한라산 한 갑 빨리 주세요."(뛰느라 사제공기 맛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네?? 행라면이라니요? 그런 라면 없는데?"

"아니, 요즘 새로 나온거요.  이름이 한문으로 적혀 있는데...." (아는 척 주억거렸다)

"아.....혹시 이거 아닌가요?"

그러면서 빨간 봉지에 담긴 처음보는 라면을 하나 건네는데, 그 봉지에 적힌 글이 눈에 확 들어온다.

<라면>

라면봉지처럼 쪽팔려서 얼굴이 붉어지는데, 아줌마가 한 소리 위로를 더 건넨다.


"괜찮아요. 한문 모르면 또 어때요. 더러 행(幸)라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어쨌거나 행라면 2개를 들고 뛰어가서 그 고참에게 주면서 외쳤다.


"김병장님, 행라면 2개 사가지고 왔습니다."

"응, 수고했어."


김병장도 행과 신을 몰랐나 봅니다. ^^;


                                                                                                           2008. 9. 2  맑은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