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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兄

맑은날T 2008. 10. 31. 16:22


난 주 출장이 있어 울산에 다녀왔습니다. 
출장 중에 잠시 짬을 내어 셋째 형을 만나서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은행에 근무하는데, 이제 지점장을 노리고 있는 잘 나가고 인기 좋은 은행원이지요. 
약속 시간보다 2-3분 일찍 도착한 탓에 은행에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다 저를 보고는 활짝 반기는 웃음으로 옷을 챙겨 입고 객장으로 나오면서 동료 몇 분에게 인사를 시키고는 점심을 하러 갔습니다. 


은 술을 잘 하고 또 즐깁니다. 
전날도 과음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복집에 가서 복지리로 해장하면서 조카의 진학이야기, 경제이야기, 아프신 노모이야기를 나누고, 식당에서 나와서 차를 한 잔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서는데 형은 봉투 하나를 주시면서 ‘차비’하라고 건넵니다. 
그래도 상장회사 차장이고, 출장온 사람인데 ‘차비’는..... 
극구 사양해도 억지로 건넵니다. 


아오는 차 안에서 “兄”에 대하여 생각을 했습니다. 
한자로 兄은 口(입 구)와 儿(어진 사람 인)이 합쳐서 만든 글자로서 “어진 말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이렇게 풀이하고 보면, 제게 있어서 셋째형은 글자와 꼭 들어맞는 사람인 셈입니다.

 
째형은 제 바로 위의 형이며 저보다는 3살이 많습니다. 
제가 어렴풋한 기억조차 할 수 없던 어린 시절 이전의 형의 모습은 어른들이 이야기로 들어서 기억합니다. 
아주 어릴 때 형은 늘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말없이 졸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사람되기 어렵겠다”라고 말을 했다지요. 


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형에 대한 기억은 많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재미있게 놀았다거나 하는 기억은 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때도 조용한 아이였겠지요. 
다만 제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형이 국민학교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늘 형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것과 그 기다림의 이유는 뚜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 가면 무료로 빵을 배급했습니다. 
그 빵은 베개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딱딱했는데, 그 속은 부드러웠지요. 
형은 학교에서 빵을 주면 손대지 않고 가지고 와서는 저와 나누어 먹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제가 좀 더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그때에도 형은 별다른 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 형 많은 아이치고 형에게 얻어맞지 않은 아이가 없었고 저도 둘째형에게는 몇 차례 얻어맞은 기억은 있었는데, 셋째형에게는 맞은 기억은 고등학교 무렵 담배피우다 들켜서 맞은 기억이 딱 한 차례 있을 뿐입니다. 


은 발육이 느려서 한 살 늦게 학교에 들어간 탓에 형이 3학년에 올라갈 때, 저도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10리 등교길을 함께 다녔을 듯한데, 신기하게도 등하교 길을 함께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쳤고, 형의 국어책을 읽는 재미를 들였는데, 형은 3학년이 되었지만 한글을 읽고 쓰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제가 형에게 한글을 가르켜준 기억이 납니다. 
한 한기가 끝나고 방학을 하는 날이면 학교에서 통지표를 나눠 주었습니다. 
그러면 집에 와서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다시 그 통지표를 들고 큰집에 가서 큰아버지께 검사를 받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사랑방에 계시거나, 쇠죽을 끓이시던 큰아버지는 통지표 검사를 하고는 제게는 칭찬과 용돈을 주시고 형에게는 크게 꾸지람을 하곤 했지요. 
형 통지표에는 모두 “가”만 적혀 있었으니까요.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형이 입학할 때 공책 몇 권을 사주었는데, 4학년이 될 때까지 그 공책만 들고 다녀서 귀퉁이는 다 떨어졌는데 속은 깨끗했다고 하니 알만하지요. 
그렇게 한글을 못 깨우친 형이 5학년이 들면서 한글을 깨치더니, 신기하게도 6학년을 졸업할 때는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형이나 제가 따로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렇게 중학교에 진학한 형은 3학년이 되자 대구에 있는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은행원이 되겠다고 하면서 학교 인근에 자취를 시켜달라고 아버님께 청하였고, 아버님은 그리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국민학교 학생 1명의 손이라도 일손으로 사용하고, 일손이 한참 바쁜 모내기나 타작 때에는 결석이나 지각 또는 조퇴를 밥먹듯이 하는 것이 농촌의 현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였지요. 
그렇게 1년을 자취생활을 하고, 학교에서는 무리라고 원서를 써주지 않겠다는 것을 우겨서 형이 원하는 학교로 진학을 하였고, 그때부터 형은 대구에서 자취생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년이 지나서 저 또한 대구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형과 자취생활을 1년간 하게 되었습니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원하는 직장에 취직을 하면서 대구를 떠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형과 한 솥밥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후 형은 군대에 갔다와서 결혼하였고, IMF 전후로 직장을 3번 옮겼습니다. 
형이 군대 있을 때, 휴가나오면 제게 용돈을 가끔 주곤 하였습니다. 
당시 보직이 사단경리병이라서 생기는 돈이 좀 있었겠지요. 
그리고 제가 군대가서 휴가 나오면 형을 찾아가서 용돈을 받아 쓰곤 했습니다.

 
직도 저는 어리기만 한 동생이었나봅니다. 
제 몸가눔도 못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던 어린 시절, 한글 먼저 깨쳤답시고 아는 척하던 동생에게 한글을 배우던 그때에도 형의 마음에 속에는 兄으로서의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었나봅니다. 
그 한없는 너그러움으로 인해서 3분의 兄중에 가장 두려운 분도 셋째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兄이란 글자는 ‘두려워하다’라는 다른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형에 대한 작은 기억을 적어 봤습니다. 
경욱이도 먼 훗날 윤석이를 떠올리며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 비가 내렸습니다. 

                                                                                 2008. 10. 31  맑은날

<2004년 가을, 바람부는 언덕에서..윤석이와 경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