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곡기에 대한 기억
새벽 5시, 이른 새벽인데 귓등으로 무슨 소리가 들려서 잠을 깹니다.
아직 해가 밝아오려면 한참인데 마당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위잉~ 위잉~"
잠결에 귀 기울여보니,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한참입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면서 방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보니, 아버지와 형들이 벼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탈곡기에는 아버지와 둘째형, 셋째형이 함께 탈곡기 패달을 밟아대고, 탈곡기는 신나게 돌아갑니다.
가운데 낀 셋째형은 볏단을 들어 탈곡은 하지 못하고 가운데에서 신나게 다리품을 팔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새벽새참을 만들고 계십니다.
냄새로 짐작컨대, 김치국밥이 틀림없습니다.
대충 옷을 끼워입고 마당으로 나서니 새벽기운이 찹니다.
오스스 떨리는 몸으로 셋째형 뒤로 가서 교대하자고 조릅니다.
셋째형과 교대를 하고는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아댑니다.
페달은 더욱 힘차게 돌아가는 듯하고, 볏단을 집어드는 아버지와 둘째형의 손길은 더욱 빨라집니다.
새참을 먹는 시간입니다.
잠시 쉬는 탈곡기에 쪼르르 달려가서 기름을 칩니다.
기름을 치는 일은 제가 맡은 일입니다.
탈곡기에 기름을 치는 부위는 세 곳입니다.
페달의 동력을 탈곡기 드럼으로 전달하는 부위, 페달의 지지점, 드럼내부 이렇게 기름을 치면 됩니다.
먼저 가는 나무꼬챙이로 기름으로 떡진 구멍을 뚫은 다음에 페달을 부드럽게 밟으면서 적당하게 치면 됩니다.
떡진 기름덩이 처리도 조심스레 아궁이에 버려야 하는 일입니다.
기름을 다 치고 시험삼아 혼자 페달을 밟아 봅니다.
한결 부드럽게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힘차게 밟으면서 볏단을 집어들고 탈곡을 시도해봅니다.
돌아가는 드럼 위에 볏단을 갑자기 올려 놓으면 볏단을 놓치고, 드럼과 볏단이 얽혀서 엉망이 됩니다.
조심스레 볏단을 올려놓으니, 벼이삭이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작은 키에 페달을 밟으랴, 탈곡을 하랴, 영 어렵기만 합니다.
기우뚱 하는 순간 드럼은 볏단을 손아귀에서 낚아채고, 갑자기 탈곡기가 볏단이 끼어서 엉켜버립니다.
아버지 쪽을 힐끗 쳐다보니,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웃으십니다.
잠시 휴식을 한 다음 다시 탈곡을 시작합니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까지 탈곡을 마쳐야 합니다.
형들은 학교에 가야하고, 탈곡기는 옆집에 빌려 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탈곡기 뒤에 가서 뒤로 던져지는 볏단을 정리합니다.
탈곡기로 탈곡을 깨끗하게 한 볏단은 뒤로 멀찌감치 던져지는데, 아버지는 뒤로 고개짓 한번 하지 않으시고
마치 창을 던지듯 멋지게 뒤로 던져내십니다.
둘째 형도 아머지처럼 멋지게 볏단을 뒤로 던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농사짓는 아버지는 멋지게 일을 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탈곡하면서 볏단 뒤로 던지기도 그렇고, 콩타작이나 보리타작을 할 때, 도리깨질도 그렇게 힘차고 멋질 수가
없습니다.
보통 도리깨질을 하면 도리깨가 한바퀴씩 회전을 하면서 타작을 하는데, 아버지는 가끔 돌아가지 않고 튀어 오르는 도리깨로 다시 내려치시기를 하십니다.
가끔 멋을 내시느라 그런 것 같은데, 진짜 신기하고도 멋집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것부터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뒤로 던져지는 볏단 더미 속에서 노는 일은 혼자 놀아도 신나기만 합니다.
집채만한 볏단 더미는 혼자서 굴도 만들고 방도 만들며 놀기에 안성마춤입니다.
새벽 이슬을 맞아 약간 촉촉한 볏단은 아직 풀냄새가 다 가시지 않아서 향긋한 풀냄새도 함께 풍깁니다.
저녁 늦게 탈곡을 하는 날이면 볏단더미 속에서 혼자 놀다가 잠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유년기의 가을은 바쁘고도 신나는 나날이었습니다.
2009. 11. 09 맑은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