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의 아빠

아이 양말을 말리면서 일몰>

맑은날T 2002. 12. 29. 21:20


맘 잡고 자보려던 일요일 늦잠을 12시도 다 못 채우고 눈을 떴다.

잠을 깨고도 잠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으로 이부자리를 끌어안아 보지만 한번 도망간 잠은 돌아오지않는다.

쳐 놓은 커텐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얼굴을 비쳐들고 있었다.

저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힌 탓일까?

이른 새벽 봄 길에 낮게 깔린 안개처럼 집안 가득 고요가 가라앉아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저께 처가로 휴가를 갔다.

결혼하고서 몇 년 전까지 아내는 여름과 겨울에 각 일주일 정도 친정나들이를 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원과 학습지 일정 때문에 최근 몇 해는 나들이를 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장모가 수술을 받아 몸이 불편하시자 겸사겸사해서 내려간 것이다.

방을 나와서 음악을 켜 놓고 밥을 앉혀놓고서 천안에서 가지고 온 빨래거리를 꺼내어 아내가

모아둔 아이들 옷가지와 함께 세탁기에 넣어 작동을 시켜놓는다.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둔 국을 꺼내어 데우고 반찬가지를 식탁에 올려놓은 다음 이부자리를 개어 넣는다.

대충 식사를 끝내고 나서 빨래를 통에 담아서 베란다에 있는 빨래건조대로 간다.



큰 옷부터 건조대에 널다가 아이들의 양말이 더러는 뒤집혀진 채 몇 켤레가 눈에 띈다.

뒤집어진 양말을 바로 하면서 아이들의 양말이 어쩌면 이리도 앙증맞고 귀여울까 하는생각을 했다.

아이들 양말을 보기야야 외출할 때 신겨주거나 잠든 아이의 양말을 벗겨주면서도 많이 보았지만

조용한 집에서 홀로, 그것도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강아지, 고양이, 꽃 등으로 짜여진 문양이 예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자그마한 크기가 앙증맞아 보인다.

새 양말도 있었지만, 유독 눈이 가는 것은 목이 약간 늘어지고 발가락이 닿는 부분에 보풀이

일기 시작하는 헌 양말이었고 그 헌 양말은 아이들 발의 수고로움을 생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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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도 참 많이 걸었구나!

어른인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처럼 보일지라도, 지금껏 걸어오느라 수고 많았다.

네가 걸어온 온 그 길은 네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것이라도,

그 짧은 길에도 맑은 숲 속으로 난 부드러운 흙길도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내리막길도 있었을

테지만 작은 네가 감당하기에는 힘이 들었을 자갈길, 흙탕길, 오르막길, 어두운길 들도 있었을 거야.

너로서는 참 힘들게 걸어왔는데 내 눈으로만 네 길을 보고 대수롭잖게 생각해서 서운키도 했겠구나.

참 미안하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은 누구나 항상 길을 걷고 산단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걸어야만 할 길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지.

마찬가지로 네 앞에도 아직 네가 두 발로 걸어야만 할 길이 많이 남았단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아득해지고 걱정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네가 걸어야 할 길들이 힘들고 어려운 길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길을 걷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듯이, 길에 놓인 어려움이나 수고로움,

기쁨이나 즐거움들도 모든 길에 다 있기 마련이란다.

다만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길을 걷느냐에 따라서 힘든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쉽고 좋은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이는 차이에 불과한 거야.

그런데 네가 어른이 되어서 길을 걷다보면 쉽고 편해 보이는 길을 가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거야.

길을 걷다가 진짜 힘들고 어렵다고 느낄 때가 더러 있지?

그 사람들은 바로 그 길을 걸어서 넘은 사람들이야.

정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들 때는 그 길 너머에 있는 쉬운 길을 생각해.

달콤한 휴식이란 고단한 수고로움이 있어야만 오는 거란다.

내가 길을 걸어오면서 느낀, 길을 잘 걷는 법 몇 가지를 이야기해 줄께.

길을 걸을 때에는 자신의 길을 불평하지말고, 힘들 때는 쉬어가기는 하더라도 주저앉아 머무르지

말고, 잘못 길을 접어들 수는 있어도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 느껴질 때는 곧장 되돌아 와야 한단다.

그리고 먼 길을 가는데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친구 몇 명을 사귀라는 거야.


지금까지는 어떻게 걸어온 것으로 보이냐구?

음~. 내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참 씩씩하고 멋지게 걸어온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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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을 널면서 이렇게 생각으로 중얼거린다.

두 아이들의 양말에게,

두 아이들의 발에게,

두 아이들에게,

그리고 아직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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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다갔습니다.

며칠 쉬다 다시 힘을 내어 길을 가야겠지요.

한해 동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수고로운 발에 감사를 드리며 송년인사합니다.


내년 한해 더욱 힘찬 발걸음하시기를 바랍니다.

2002. 12. 30 맑은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