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의 아빠
책 한 권 읽어보시죠?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맑은날T
2003. 12. 26. 20:26
당신은 지금 약속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약속시간이 5분 정도 지났는데 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지금 어디쯤 있냐면서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음~ 여기는 그곳에서 1,723미터 떨어진 곳인데, 차량의 흐름이 현재와 같고 정전 등의 돌발사태로 신호가
고장나지 않는다면 7분 16초 지나면 도착할거야.”
당신이 친구의 이런 대답에 쾌활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성석제의 단편 소설을 권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라면 벌써 다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성석제의 글에는 웃음이 들어있다.
그냥 싱거워서 피식하고 웃는 흘린 웃음이나, 어처구니 없어서 웃는 실소도 더러 있지만,
대체로 유쾌한 웃음이 들어있고 그래서 재미있다.
따라서 그의 글을 읽은 직후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더라도 방금 읽은 글을 생각하면 안된다.
그의 글을 생각하면 당신도 모르게 자꾸 실실 웃게 되고, 버스 운전사가 깐깐한 사람이거나,
신고정신이 투철한 지하철 승객이 옆 좌석에 앉았을 경우 신고 당하는 곤욕을 치를지도 모른다.
어떤 이야기꾼은 이렇게 말을 한다.
이야기꾼이 남을 웃기기 위하여는 이야기꾼은 절대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능청스러움과 엉뚱함이 웃음을 유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성석제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능청스러운 사람이다.
그냥 능청스러운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능청스럽다.
성석제의 능청스러움은 그의 이력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아주 잘 생기고 도회풍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알고 보면 능청스럽게도 경북 상주의 깡촌 출신이다.
그의 글에는 기발한 상식이 많고, 싱겁기는 그 끝이 없어서 천부적인 이야기꾼임을 느낄 수 있는데,
엉뚱하게도 법학을 전공했고 법학의 고루함이나 따분함은 그의 글에서 보이지 않는다.
성석제의 글은 일반적인 소설에서 나타나는 장르적인 특성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구들이 따스한 사랑방에서 입심 좋은 고향친구의 재담을 듣는 느낌이 든다.
그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문학적 장르나 정통성’시비로 문단에서 배척되어 그의 글을 계속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는데, 요즘 그의 책이 연이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런 걱정은 접어도 될 만큼
그의 글은 새로운 장르로 인정받은 듯하다.
어쨋던 그의 글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재미’있다고 할 것이고, 이를 풀어쓰자면 번뜩이는 재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재담, 가벼우나 천박하지 않고, 분석적이나 따분하지 않고, 엉뚱하면서도 철학이 담긴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단편 소설집 한 권을 사서 쭈욱 끝까지 읽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나 할 일이 없거나,
한 권을 다 끝내야 하는 숙제를 받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조금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다만 그 단편소설을 지은 이가 성석제가 아니라면 말이다.
외출하기엔 너무 추운 일요일 오후에는 거실에 드러누워서 낄낄대면서 성석제의 글을 읽어보자.
그러면 무겁고 갑갑한 일상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책 한 권을 소개하는 글을 부탁받았는데, 써다보니 작가 한 명을 추천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소설집에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재미나는 인생' '새가 되었네' '호랑이를 봤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등이 있고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궁전의 새' '순정'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한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권하고 싶다.
그런데 정작 추천 글을 쓰는 본인은 이 책이 아직 없다.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동인문학상 수상집에서 이미 읽었기 때문에 아까워서 사지 않은 것이다.
혹시 이 추천 글 때문에 성석제의 글을 처음 읽어보신 분이 있어 추천글에 고마움을 느끼는 분이 있다면 선물하여도
누가 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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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본사에서 전화가 와서 협회지에 도서추천란이 있는데 책 한 권 추천하는 글을 부탁하였습니다.
“원고료가 얼만데?”
“우리회사 사보보다는 나을 겁니다.”
돈에 눈이 멀어 몇 자 적어 보냈습니다. ^^;
2003. 12. 26 맑은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