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의 아빠
꽃싸움 진달래>
맑은날T
2001. 4. 11. 08:35
꽃 싸 움
卍 海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 「꽃이 피거든 꽃싸움 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오십니까.
나는 한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오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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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님의 글입니다.
이 글을 볼 때마다 어릴 적에 꽃싸움 하던 기억이 납니다.
마땅한 장난감도 놀이기구도 없었던, 풀이랑 꽃이랑 나무랑 어울려 노는 게 전부였던 유년기가...
봄이 되면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진달래(두견화)를 꺾으며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진달래 중에도 양지 쯤에는 유난히도 수 십 개의 꽃이 뭉쳐 피는 진달래가 많았고, 그런 꽃들을 우리는 '주먹 꽃'이라 불렀습니다.
온 산을 헤집으며 꽃을 꺾다 보면 조그마한 아이의 몸피는 어느덧 꽃에 가려 보이지 않고, 멀리서 보면 아이는 없고 붉은 진달래 꽃뭉치가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배가 고프면 진달래 꽃을 한 움큼씩 따서 먹고, 그러다 보면 입술이랑 혓바닥은 불그레한 진달래 꽃물이 들곤 하였습니다.
진달래 꽃의 암술(주위에 여남개의 여린 수술이 있고 꽃 가운데 약간 붉고 긴 암술이 하나 있어 수술보다 질겼습니다)을 뽑아서 서로 걸고 당기기를 하여 끊기를 하는데 이것을 꽃싸움이라 합니다.
먼저 끊어지면 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꽃싸움을 하다가 보면 보다 붉은 꽃술이, 보다 굵은 꽃술이, 보다 양지쪽 꽃술이, 그리고 지기 직전의 꽃술이 질긴 것을 알게 되고, 이러한 꽃술을 찾아 또 헤매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유년기의 봄날은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봄날이 깊어가면, 온산을 불태우던 그 어릴 적 진달래가, 나뭇짐 언저리에 진달래 한다발 얹어 오시던 돌아가신 아버님의 운치가 떠오릅니다.
2001. 4. 11 맑은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