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동생 <풍란>
“오빠! 머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좀 이따 내가 전화하께.”
“지금 급한데.....”
어제 오후에 외근을 나가서 상담을 하던 중에 부산에 있는 막내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급하다기에 양해를 구하고 잠시 통화를 하였습니다.
내용인 즉, 일요일 저녁에 할인매장에 쇼핑을 보고 오던 길에 잠깐 후진을 하다가 차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초등학생을 건드렸는데, 내려서 보니 아이가 별 이상없고 엄마도 아이가 괜찮은 것 같다고 하여 현장에서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헤어졌고 어제 아침에도 전화를 하여 물어보니 이상없다고 했는데, 아이 엄마가 오후에 전화가 와서 하는 소리가 ‘병원에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한 쪽 다리가 사고 때문에 조금 짧아진 것 같으니 치료비로 350만원을 달라’고 한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물어보니까, 아마도 아이 엄마가 현장에서 병원으로 아이를 데라고 가지 않는 것을 빌미로 ‘뺑소니’ 운운 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간단하게 통화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다시 동생에게 전화하여 그 아이 엄마의 전화번호를 불러 달라고 하여 직접 통화를 하였습니다.
아이 엄마의 주장사항은 동생이 횡단보도에서 후진을 하여 아이를 충격하는 사고를 야기하였다는 것, 사고 당일은 아이도 놀라서 괜찮다고 하였는데 다음날 자고 일어나보니 허리가 아프다고 하여 병원에 가보니 다리가 짧아져서 치료를 한동안 받아야 한다고 했다는 주장, 동생이 오후에 전화를 하니 ‘어제는 괜찮다고 하시다가 오후에 갑자기 왜 그러냐’고 해서 화가 났다는 등의 이야기를 따발총으로 쏘아대듯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쪽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동생에게 전화하여 횡단보도가 맞는지와 혹시 인도위에 있는 아이는 아니었는지를 재차 확인한 바, 시장통 길에서 사고가 났으며, 횡단보도나 인도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어차피 보험처리해야 할 것 같으니까, 다시 전화하여 공손하게 사과하면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돈을 요구한다면 먼저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고 보험접수를 하라고 이야기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동생이 다시 전화를 하여 하는 소리가 파출소에서 대충 조사하였는데, 아무래도 횡단보도사고로 처리될 것 같다고 하면서 당사자간에 마무리 되지 않으면 경찰서로 넘겨서 정식으로 사고처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파출소 가기 전에 횡단보도 여부에 대하여 물었을 때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고, 횡단보도 사고라면 중대과실사고로 개인합의가 필요하고, 보험할증도 많이 되는데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보자 파출소 가는 길에 확인해보니 횡단보도선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제가 다시 아이엄마와 통화하였습니다.
‘사고 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접촉사고로 다리가 짧아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찰서 신고하고 보험처리하게 되면 보험료도 많이 오르고 경찰서에 몇 번 불려다녀야 하는 데 직장을 가진 동생은 부담스럽고 남편이 아는 것도 부담스러워한다, 그리고 보험처리해도 초등학생은 일을 못하는 손해가 없으므로 실제로 아이에게 지급되는 돈은 별로 없을 것이다.’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합리적인 금액을 제시하면 입금하고 사고마무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몇 번의 승강이를 거쳐서 80만원을 입금하여 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하고 통화를 종료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퇴근하는 길에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자 자꾸 화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그러는 것이야 이 사회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고, 문제는 동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왜 동생이 일요일에 혼자서 조카 둘을 태우고 마트를 가야 했는지, 이 문제를 남편에게 말하길 꺼려하는지에 대하여 신경쓰이고 화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은 위로 오빠가 다섯이나 됩니다.
키도 커고 인물도 빠지지 않는 초등학교 선생인데,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교다닐 때 만난 서클선배와 결혼을 했습니다.
학교 다닐 적에 선배 집에 자주 놀러갔는데, 그 선배의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동생을 무척이나 귀애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못받았던 아버지의 사랑을 그곳에서 느꼈던가 봅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시가 쪽이 박씨 문중의 종가이고 남편이 종손이어서 소위 ‘종가집 며느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일년만에 아들을 낳고 또 그 밑으로 귀여운 딸을 낳았으니 종가집 며느리로 큰 일도 해내었습니다.
박서방은 초등학교 선생인데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하고 과묵한 남자로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그것이 좀 맘에 걸렸지만 지들이 좋아하는데 오빠들은 반대하고 말고할 입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동생이 시집을 갈 때 결혼식장에서 눈물이 날뻔 했습니다.
아버지 없이도 착하게 자라서 저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동생이 고맙고도 대견해서였습니다.
동생을 유독 예뻐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어린 동생이 안타까워 더욱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심한 다섯 오라비와 나이 많은 어머니 밑에서 잔 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동생이 시집가서는 남편이나 시부모님의 잔정을 많이 받고 살기를 바라는 핏줄의 욕심은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가끔씩 명절에 보는 박서방은 그런 잔정을 가진 남편이나 아빠는 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카들이 유독 엄마에게만 안기고 아빠를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어제 전화통화를 마치고 나서 다시 박서방의 무심함이나 무뚝뚝함이 맘에 걸리고 화가 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일을 동생에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고, 박서방에게 직접 무어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보니 더욱 답답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날 박서방이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사고난 문제에 대하여 동생이 박서방을 상담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이래 저래 답답한 어제였습니다.
혹시 무슨 묘안 있으신 분 없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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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에 봉화에 가서 가져온 풍란이 봄이라고 꽃을 피웠습니다.
2006. 3. 28 맑은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