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만 이야기 <바람꽃>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어떠한 생각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그 전이나 그 뒤로 그러한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 진다고 해도 다시는 생각하지 않을 그러한 기억 말이다. 따라서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든 생각이 아니라 우연히 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하겠다.
그때도 아마 이런 날씨였던 것 같다.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그렇다고 봄도 아닌 그런 날씨 말이다.
코 끝이 맵싸하니 추우면 딱 어울릴 것 같은데 하늘은 회색으로 가라앉았고 축축한 바람은 발 아래에서 약간 맴돌다 마는, 근질근질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온 몸을 스물스물 기어다니는 기분이 드는 날씨였다.
이런 날씨 하나도 간단하게 묘사하지 못하는 무딘 언어감각이 답답해진다.
고향에서 하는 말로는 “머시 올 것 같은 날씨”라고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이 말을 이해하고 알아들을 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것은 아마도 10년쯤 되었겠다.
그 전에 본 것이 또 그보다 5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 본 것은 그보다 5년쯤 전이었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그녀를 처음 본 것은 20년쯤 전이 된다.
갑자기 그녀를 생각한 것은 잔잔한 글이 좋은 어느 소설가의 단편소설을 보다가 “바람꽃을 연상케 하는 여자”란 글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에게서 바람꽃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책을 보고 난 지금도 그녀가 바람꽃을 닮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꽃으로 말하자면 안개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다발로 묶인 안개꽃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고, 한 송이의 안개꽃은 너무 왜소해서 어울리지 않고, 그냥 안개꽃 작은 다발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본다면 그나마 그녀와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딱히 그녀와 어울리는 꽃을 찾진 못하겠다.
달리 그녀를 표현하다면 아주 연하디 연한 회색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당하다.
흰색은 맑긴 하지만 멍청해보이고 회색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어두워서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
그녀는 화려하지도 않지만 단조로운 것은 더욱 아니고 맑긴 했지만 속이 들여다보이진 않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무겁진 않았다.
그녀는 20년 전 어느 날 그냥 내 곁에 있었다.
그 당시 내게 처음 다가오는 그녀의 부류들은 곧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내보였거나, 너무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이 끊어진 상태로 다가 왔는데, 그녀는 언제 왔다가 언제 갔는지 모르게 그녀들의 부류와는 아주 판이하게 바람처럼 왔다가 흔적없이 그렇게 갔다.
그녀가 내게 처음 한 말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게 나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는지, 아니면 나에 대하여 처음한 말인지는 기억이 아슴아슴하지만 아마도 처음 건넨 말이자 나에 대하여 처음 한 말인 듯하다.
사실 처음이고 끝이고 간에 말을 주고 받았는 게 별로 없어서 그 말이 처음이자 끝으로 한 말이라고도 생각되기도 한다.
‘아저씨, 참 착해보이네요.’
그녀와의 인연이나 그녀와의 이야기에 대하여 쓸라치면 아예 처음부터 할 말이 없고 이 글을 쓰지도 않았어야 한다.
그냥 기억이나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대하여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그녀’라고 표현하면 이 글을 볼 가능성이 없는 ‘그녀’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
그녀도 나를 ‘그’라고 생각한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그녀와는 ‘그’나 ‘그녀’의 개념구분이 전혀 없었던 것이 맞을 것 같다.
여자형제 없이 자란 나는 유독 ‘그’와 ‘그녀’에 대한 개념구분이 예민한 편인데, 지금도 ‘그녀’는 ‘그녀’가 아니라 그냥 ‘그’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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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런 생각이 질정없이 든 날이다.
2006. 11. 21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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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