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깡 이야기 <바리깡>
회사에서 나를 ‘바리깡’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일종의 별명인 셈이다.
이러한 별명이 붙은 내력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바리깡과의 인연부터 이야기 하자.
어릴 적 시골에서는 대부분 집에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빡빡 밀었다.
머리에 이가 생기는 것을 막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솔찮이 들어가는 이발비용을 줄이자는 것이 주목적인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우리 집에도 바리깡이 한 대(?) 있었는데, 그것으로 우리 오형제는 돌아가면서 서로 깍아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바리깡은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었으니 바리깡의 중간 이가 하나 부러져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머리를 밀면 바리깡이 지난 자리 가운데 머리는 깎이지 않고 줄모를 심듯이 한 줄로 깍이지 않은 머리카락이 남게 되어 두 번 손이 가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 중에 그것을 부러뜨린 사람을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결국 돌아가시기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말았는데, 오형제중 나만 그 범인을 알고 있었다.
바리깡을 새로 산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이다.
혼자서 심심하니 할 일이 없던 차에 눈에 띄는 바리깡을 집어들었고, 바리깡 이빨 사이에 종이를 끼워서 잘라보니 아주 부드럽고도 예리하게 잘려나갔다.
그래서 다시 한 겹 접어서 잘라도 역시 잘 잘려졌고, 그렇게 두 번 세 번 네 번을 접다가 결국 이빨하나가 뚝 부러졌고 그것이 우리 집안의 오래된 미스테리의 하나인 “그 비싼 바리깡의 이빨은 어디 갔을까?”의 내력이다.
그렇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었고 이발소에 처음가서 “하이칼라”(스포츠형 머리스타일을 그렇게 불렀고, 시골에서는 ‘하리갈리’라고 했었던 것 같다)를 했을 때 인생이 또 한번 행복했었다.
차가운 비누거품을 바르고 귀밑머리와 목덜미의 잔털을 밀어낼 때의 쾌감은 상상으로 아직도 느낄 수 있을 듯 하다.
그렇게 고등학교 들어가서 바리깡과는 완전히 인연이 멀어진 줄 알았는데, 군대에 가서 또 바리깡을 잠시 손에 잡고 신병의 머리를 대상으로 다양한 종류의 조형미술을 창작한 기억도 있다.
그럼 이제 왜 별명이 ‘바리깡’이 되었는지 이야기 할 차례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96년인가 노동조합 간부생활을 할 때에 노조위원장이 임금투쟁을 하기 전에 분위기 살린답시고 수도권 직원들을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 모아놓고 삭발식을 하였는데 그때 깎사노릇을 내가 한 탓이다.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본 당시의 인사부장이 내게 붙인 별명이 그것이다.
그 때만 해도 화이트칼라의 노동조합도 꽤나 강성이었고, 내가 다니는 회사의 노동조합도 그런 편이었는데, 임금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회사와의 교섭이 여의치 않아 투표를 붙인 결과 파업으로 결론이 났다.
결국 파업을 하자면 사용자의 항복을 받아야 노동조합이 사는 데, 그 승부의 관건은 조합원의 파업참여율과 지속율에 달려있다.
그래서 밤샘 회의를 한 결과 위원장의 삭발식을 하여 파업열기를 고조하는 준비절차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났고, 삭발식에 깔릴 배경음악도 결정하였는데, 깎사를 할 사람이 여의치 않아 고민하다가 내가 손들고 자원해서 깎기로 결정했다.
삭발식을 하는 당일, 성균관대로 가는 길은 자못 비장했었다.
가는 길 곳곳에 인사부 직원이 감찰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수도권의 조합원(2/3정도는 여직원이다)들도 대거 참여를 하였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강하고도 비장한 톤으로 파업의 불가피성과 아울러 전폭적인 참여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는 동안 우리 간부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뒤에서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드디어 삭발식을 하는 순서가 되자 단상 가운데에 의자가 놓여지고 보자기를 두른 위원장이 앉았고, 전기바리깡을 들고 내가 나섰다.
자못 비장한 음악이 나지막하게 흘렀고, 뒤에 도열한 간부들은 고개를 푹 숙였으며, 단상아래의 조합원들은 임금작취(?)에 대한 분노와 아울러 삭발을 하는 위원장에 대한 연민으로 할 말을 잊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비장한 마음으로 앞머리부터 천천히 밀어올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단상아래에서는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위기에 맞추어 앞머리를 다 밀고 음악은 조금 강한 것으로 바뀌면서 옆머리를 다 밀고, 뒷머리로 바리깡을 옮겼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미용실에서 빌려온 충전바리깡이었는데, 힘찬 손떨림이 갑자기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충전한 전기가 바닥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다급한 마음으로 성급하게 바리깡을 밀고 있는데, 전기의 힘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마구 밀어올리다보니 생머리가 뜯겨지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깎는 나나 깍이는 위원장이나 한결같이 비장하고 엄숙한, 심어지는 경건한 마음이었는데, 전기가 바닥을 보이면서부터 나는 나대로 빨리 다 깎아야만 한다는 필사적인 목표가 생겨버렸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눈물을 흘리던 위원장은 뜯겨지는 머리의 통증만은 어쩔수 없었던지 뜯겨질 때 마다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단상아래는 이미 울음바다였고, 단상의 간부들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상황에서 뒷머리만 베컴모양으로 남겨진 채 삭발식이 끝나버리면 이 얼마나 황당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결국 남은 뒷머리의 1/3은 잘리고 1/3은 뜯기고 남은 1/3은 뽑는 것으로 삭발식은 끝났고, 삭발식을 마친 위원장이 생어리를 뜯긴 고통으로 상기된 얼굴로 일어서서 단결투쟁가를 부를 때, 뒤에 서 있는 내 눈에는 쥐 뜯어먹다 만 것 같은 위원장의 뒷머리만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와 위원장의 고충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별명의 작은 내력이다.
2004. 9. 7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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