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을테고, 지금도 그럴거고, 앞으로도 쭈욱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 있다.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개랴, 아마도 세 개는 넘을 듯 한데 그 중의 하나가 남자랍시고 맘에 드는 여성에게 접근하는 일이다.
혹자는 이 일이 점잖지 못하다고 비난하기도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비난이나 칭찬의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기인한 일로 치부해야 할 일이다.
학교 다닐 무렵 이 일을 두고 일컫기를 영어로는 '헌팅'이라고 하였고, 한자로는 '유혹'이라 하였고,
은어로는 '가데기'라고 하였으며, 비어로는 '후리기'라 하였고, 순수한 우리 말로는 '꼬시기'로 칭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때의 외로운 청춘의 몸부림으로 이일을 겪고 넘어가지만, 이 일이 직업, 생계수단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러한 종족은 별도로 '제비족'이라고 불리며, 이 일이 직업은 아니나 취미생활로 계속하는 자를 '바람둥이', 일명 '풍족'이라고 한다.
이제 불혹을 바라보는 지금에 생각하면 그냥 피식 웃을 일이지만, 이 몸도 그러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고,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이 일의 성공여부는 무엇보다도 풍부한 사전조사와 이에 따른 치밀한 계획,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과감한
결단성이 요구되며, 옵션으로는 뻔뻔하고도 두꺼운 얼굴이 필요하다.
보다 고난이도의 대상을 공략함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그 대상이 헌터가 아니라 그 누구와라도 만남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어서 상대방이 최초의 만남에 있어서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89년이었으니까 벌써 14년이나 지난 일이다.
내 나이 십대나 이십대에 '14년 전의 일이라는 일'들을 들어보면, 임진왜란이나 정묘재란 직후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겨졌는데,
지금의 나이에서 돌아보면 불과 엊그제의 일처럼 여겨지니, 시간의 흐름에도 세대차이가 있나보다.
하여튼 그해 4월에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였다가 스스로 복학준비가 안되었다고 판단하고 휴학계를 낸 다음
동네 독서실에서 두문불출, 동구불출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만 용돈을 얻어쓰기가 민망해서 중학생 하나를 과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실에서만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7월초였을 것이다.
그 날 오후, 독서실 회비를 내려고 가까운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다.
동네에 있는 작은 은행이었는데, 은행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어깨에 띠를 두른 아가씨가 꾸벅 인사를 하면서
'어서오십시오~' 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그 아가씨가 고개를 숙일 때 까지는 그녀는 일상에서 스치는 하나의 객관화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나 '레'음이 아닌 부산에서는 듣기 어려운 '솔'음에 가까우면서 순도 99.9%의 맑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울리고,
그 소리는 연이어 고막을 진동시키면서 달팽이관을 통하여 제8뇌신경인 청신경을 통하여 대뇌로 전달되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녀를 보게 되었고, 그녀의 얼굴윤곽이 다소 어두운 오후의 객장 조명에 의하여 반사되면서
어두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열려있는 홍체와 수정체를 거쳐서 망막에 비쳐지고, 곧바로 제2뇌신경인 시신경을 통하여
대뇌로 전달되자마자, 그녀는 가치와 의미를 가진 '아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그때까지 침침하던 은행 안은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단정하게 묶은 긴 생머리와 에어컨 바람에도 부드럽게 흔들리는 여리디 여린 귀밑머리, 계란모양의 하얀 얼굴과
까만 눈썹아래에 쌍거풀진 큼지막한 두 눈, 적당히 넓은 미간아래로 곧고 오똑한 콧날, 그리고 윤기흐르는 입술과
부드러운 턱선 아래로 흐르는 긴 목,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인이었다.
(하강선녀나 월궁항아같은 모습이었다고 해야하나, 유감스럽게도 선녀나 월궁항아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소설책에서의 미인 모습을 고루 갖추고 있었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미소를 지을 때 없는 듯이 살풋 드러나는 보조개와 왼쪽의 덧니였다.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멍하니 그녀를 본 다음 창구에 돈을 찾으러 갔는데,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 가 있었다.
다른 여직원과는 달리 근무복이 아닌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그녀가 여름방학동안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시간이 걸리지 없었다.
이유없이 허둥거리고 두리번거리면서 은행을 나서면서 그녀와의 어떤 운명을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실천은 빨랐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집에 오자마자 전화기를 들고 114를 누른 다음 그 은행지점의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띠리링~
"안녕하십니까! ○○은행 ○○지점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곳에 근무하는 아르바이트 학생 좀 부탁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 '잠시'는 어떻게 보면 천년같이 긴 시간으로도 기억되고 달리 생각하면 찰나로 기억되기도 한다.
"네. 전화바꿨습니다."
이름을 말하지 않는 걸로 봐서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사람으로 생각되어진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일보 사회부 홍길동 기자입니다."
"네에? 그런데요?"
그녀는 놀란 모양이다. 놀라게 하면 안된다.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저희 신문에서 대학생 아르바이트 실태에 대하여 특집기사를 싣기로 했는데, 간단한 질문 몇 가지 협조 부탁드릴려구요. 가능하시죠?"
"네에~ 그러세요."
그녀는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은 사실에 대하여 약간 상기된 듯 하였다.
그리고는 그녀의 학교, 학년, 전공, 가족사항, 거주지, 부모의 직업, 출퇴근 수단 및 시각, 용돈의 사용처 등의
정보를 대부분 입수하였다.
'취재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말을 잊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과 그 다음날은 전략을 짜느라 책 한 줄을 보지 못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했지만, 상대를 안다고만 이기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여자란 달팽이 같아서 약간만 톡 건드리면 안으로 쏙 움츠려들고 말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접근을 해야한다.
그녀가 그곳에서 하는 일은 손님을 불편함 없이 도와주는 일이고 그렇다면 스스로 도움이 필요한 손님이 되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온 전략은, 물건을 들고 은행을 찾았다가 그 물건을 잠시만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물건을 맡기고
은행을 나와서는 3-4일 정도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녀는 싫든 좋든 나에 대하여 신경쓰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 다음에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하여 그녀가 퇴근할 때 지금 남포동(그녀는 그곳을 거쳐서 퇴근한다)에
있는데 혹시 퇴근하는 길이라면 물건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단 그녀와 개인적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작전이었다.
이틀 뒤 일부러 손님이 약간 붐비는 시간에 그녀에게 맡길 전공서적 한 권과 사상서적 한 권, 그리고 시집 한 권이
들어있는 종이백을 들고 은행을 찾았다.
은행을 들어서면서 얼핏 바라본 그녀는 대학생답게 스포티한 캐주얼 차림이다.
그녀의 인사를 귓전으로 흘리는 척하면서 창구로 곧장 간다.
창구에서 돈을 찾은 다음 그녀 바로 곁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동전을 넣고 아무 번호나 누르니, 신호가 간다.
동전이 덜컥 떨어지고 어떤 아줌마가 받는데 잠이 덜깬 목소리다.
"여보세요."
"형~, 나 맑은날인데요. 무슨 일이에요?"
"여보세요? 누구 찾는데요?"
"예에~?. 언제 그랬는데요?"
"여보세요? 지금 어디로 전화하셨어요?"
"형 지금 바로 제가 갈께요."
황당해하는 아줌마와 전화를 끊고, 다소 높은 목소리에 놀라서 쳐다보는 그녀에게 곧장 다가갔다.
"저기요~.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이 종이백 잠시만 맡아 주세요"
"...네. 그러세요."
얼떨떨해하는 그녀에게 종이백을 맡기고는 서둘러 은행문을 나섰다.
그로부터 3일 뒤 오후 다섯시쯤 은행에 전화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은행 ○○지점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곳에 근무하는 아르바이트 학생 좀 부탁합니다"
"그 학생 아르바이트 그만두었는데요."
"네에? 왜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
그날 오후 그 은행에 들러서 직원들에게 물어 물어 결국 청원경찰에게 종이백을 돌려 받아서 독서실로 되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내 젊은 날의 일주일 동안 혼을 훔쳐간 그녀도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때 그 신문기자가 인터뷰 해놓고 기사는 왜 쓰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모를 것이다.
아직도 이맘 때면 그 일을 궁금해할까?
2003. 7. 15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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