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
다소 따분하고, 약간 권태롭고, 가족 구성원에게 딱히 뭐라하기는 그렇지만 막연한 불만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현재 행복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그런 상태를 아주 절실하게 그리워하기도 할 것입니다.
# 가출- 금요일 15:00
지난 금요일 오전, 각시가 전화를 했다.
윤석이와 경욱이 행동이 마뜩찮아서 동네 PC방에 가서 확인해보았더니 방학기간동안 두 녀석이 일주일에 평균 5일 정도, 그리고 하루 2-3시간 정도 게임을 했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서울에 좀 올라와서 혼내줘야 겠다는 것이었다.
듣고보니 기가 찬다.
부산과 마산에 일이 있어 올라가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그러자고 했다.
그날 오후 3시, 윤석이가 집을 나가버렸다고 다시 연락이 왔다.
알아본 즉, PC방 출입(출입이라기보다는 거의 출근)이 들통나자 혼나는 것이 두려웠고, 엄마에게 '아빠 올라오지 말도록 전화하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고 협박하였고 이것이 통하지 않자 집을 나가버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알았다면서 좀 있으면 들어올 것이니 기다리고 있으라 하고 끊었다.
전화를 끊고나니 손이 떨렸다.
하루에서 대여섯번씩 햇빛알러지가 있어 땀을 흘리면 안된다며 차로 녀석을 태우고 다닌 각시가 불쌍해지고, 몇번이나 다짐하고 약속했던 PC방가지 않기로 한 약속에 대한 배신감에 녀석들이 눈 앞에 있으면 그냥 다리몽댕이를 분지럴 것 같았다.
# 수색- 금요일 23:00
금요일 밤 열시, 집에 도착하니 경욱이만 집에 있고 지은 죄가 있는지 고개를 외로 꼬며 눈치를 살핀다.
물어보니 각시는 형을 찾아본다며 좀 전에 나갔단다.
밤 열한시가 넘어 각시가 기운빠져 들어왔다.
상황을 물어보니 녀석의 행색은 이랬다.
슬리퍼, 반바지, 셔츠, 깁스한 오른 팔, T머니 4,000원....이것이 전부였다.
단촐하다.
밤 12시가 될 때까지 각시와는 딱히 할 말이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열두시 넘어 집을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동네를 돌았다.
11단지, 12단지, 13단지, 14단지, 상가밀집지구, 양천공원....
아파트 단지마다 소공원이 있고, 동마다 작은 쉼터가 있어 돌아볼 곳은 어찌나 많은지 모르겠다.
집으로 오니 한시가 넘었고 TV에서는 열두번은 보여주었을 올림픽 리듬체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속 상한 마음에 양주를 몇 잔 들이키고 자리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아 두시쯤 집 주위를 걸어서 한바퀴 들어본 다음 집에 들어왔다.
화가 나기보다는 걱정과 염려가 더 컸고, 현관 밖의 사소한 소리마저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각시와는 그때까지 아주 사소한 몇 마디만 주고받았을 뿐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서로에게 입 밖에 내는 그 자체가, 그리고 서로가 그 걱정을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술을 한 잔 더 먹고 억지로 누웠다.
온 동네는 한일전 중계로 뜨거웠다.
시청 앞에 축구보러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설핏 잠이 들었다.
# 미귀가 - 토요일 아침
각시가 뜬눈으로 밤을 세우더니,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며 커피를 타서 주니 속이 쓰려서 먹지 못하겠단다.
9시가 되어 양천경찰서로 갔다.
실종자 전문수사팀으로 가라고 한다.
들어가니 나이 많은 팀장님이 여유있고 느긋한 목소리로 자신의 경험을 곁들인 훈시를 하신다.
20분 가량의 훈시가 끝나고 담당경찰관에서 서류작성해주고, 사진도 제출했다.
똘똘해보이는 조OO 경찰관은 잠시 면담하자며, 자신의 경험(K대 나왔다고 자랑했고, 뿌듯해했다)을 곁들이면서, 동파방지를 위해서 수도꼭지를 잠시 열어둬야 하는데 너무 잠그려고 한 것이 아닌지 물어본다.
그리고 윤석이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은 누군지 물어보는데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정식으로 접수하면 학교 당직실로 즉각적인 통보를 해야하고 기록도 남을 것인데 그러면 입시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고 안내한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T머니 사용내역은 자신들도 월요일이 되어야 확인할 수 있다고 하길래, 접수를 보류해달라고 요청하고 돌아왔다.
# 기다림과 수색 - 토요일 낮
집에 와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차로 도서관을 향했다.
각시 생각에는 더운 날씨를 아주 싫어하고 MP3 플레이어도 두고 갔으니, 아무래도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거나 시청각자료실에서 컴퓨터나 영화를 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고척도서관에 도착하여 열람실별로 다 돌아보았으나 없었다.
다시 차를 운전하여 양천도서관으로 항했다.
8층 건물이라 다 돌아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역시 없었다,
도서관을 나와서 도로를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하수구 아래에 천원짜리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녀석이 저거라도 발견하고 꺼내어 뭐 먹을거라도 먹었으면' 하면서 쳐다보았다.
# 염려 - 토요일 낮
집을 나간 다음 돌아오지 않으니 그야말로 걱정과 염려가 산더미였다.
먼저, 뉴스에 나오는 자신에게 나쁫 짓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방정맞다면서 스스로에게 도리질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었고, 서로에게 차마 말 못하는 걱정이있다.
두번째는 먹을 것이 해결되지 않아서 나쁜 짓을 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꼬맹이들 돈 뺏는 것이야 하지 않겠지만, 먹을 것을 훔치거나 차문 잠그지 않은 차를 뒤지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짓은 곧바로 인생을 망치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세번째는 불량배에게 걸려서 엊어맞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생이이었는데,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네번째는 범죄자들에게 붙잡혀서 몸값요구하는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딱 봐도 별 귀티가 흐르지 않는 차림새라 그 걱정은 금새 접었다.
그리고 돌아왔을 경우 어떻게 대처하나, 월요일에 장인어른 병원 입원 도와주러 간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아토피가 있어 햇빛을 쬐면 안되는데 어쩌나, 아무거나 주어먹다 식중독걸리면 어쩌나 까지 아주 다양했다.
# 착한 아들 - 토요일 오후
자전거로 동네 pc방을 거처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생각하니 윤석이는 착하고 좋은 아들이었다.
큰 사고친 적이 없었고, 공부도 곧잘하고, 배째라면서 학원안간 적도 없었고, 술아니 담배로 속 썩힌 적도 없었다.
사대육신 멀쩡하니 자라 주었고, 키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딱히 아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닌 아까운 아이였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발목을 분질러야할 문제아였는데, 아이가 집을 나가자 착한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아빠에게 혼이 날까 걱정하는 마음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욱하는 심정에 나갔다가 자존심 상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 것이다.
혼 내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휴대폰 압수당한지 1년차 되는 녀석이라 전할 방법이 없었다.
네 편은 수 없이 많으며, 아빠, 엄마, 네 동생은 언제 무슨일이 있어도 네 편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런 적이 없었고, 그럴 수가 없었다.
오후3시경 고척도서관을 한번 더 둘러보고 돌아왔다.
# 수사 - 토요일 저녁
네가 집나가면 어떻게 할 거 같냐고, 경욱이에게 물어보니 경욱이 대답은 간단하다.
그냥 동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자녁에는 아무 독서실에 숨어 들어가서 잠을 자겠단다.
해가 뉘였해질 때 자전거를 끌고 나와서 온 동네를 한바퀴 돈 다음, 학원 인근으로 갔다.
학원가는 길에 이마트가 있는데 아무래도 그 곳에서 배고픔을 해결할 가능성이 옾다고 판단해서였다.
이마트에 들어가서 두바퀴를 돌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아직 식사시간이 아닌가?'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경욱이를 학원에 보내고, 각시를 차에 태우고 다시 이마트에 가서 돌아보았다.
그곳을 나와서 인근에 있는 홈플러스로 향했다.
홈플러스를 다시 두바퀴 돌고나니 각시가 많이 힘들어하고 나 또한 많이 지쳤다.
더 이상 찾아볼 곳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각시는 어제 밤보다 오히려 냉정을 되찾았다.
친구 몇 명에게 전화걸어 우회적으로 탐문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각시는 방에 들어가서 윤석이를 비교적 잘 알고 통하는 과학학원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다시 자전거를 끌고 양천공원으로 한 바퀴 돌았다.
어제부터 보이는 노숙자 한명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다가가서 핸드폰에 있던 윤석이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니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단다.
# 포기 - 토요일 밤
일요일 오후까지 그냥 기다리자고 했다.
내가 대구에 내려가는 시간이 일요일 오후이니, 그 시간쯤 내가 아무일 없다는 듯이 차려입고 지하철 역으로 가서 그 곳에서 몇 시간 기다리면 집에 올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때까지 그냥 기다리자고 각시에게 말했다.
아직도 TV에서는 올림픽으로 시끄러웠다.
22시경 그리고 24시경 다시 자전거로 동네 한 바퀴 돌았다.
아이를 찾기 보다는 그냥 집에 있는 것이 갑갑해서 그랬다.
# 음주 - 일요일 새벽 1시
술을 한 잔 먹었다.
취기가 오르지 않아 두어잔을 스트레이트로 더 마셨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 사진을 뽑아서 아파트 관리실마다 다니며 수배 부탁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하였다.
# 귀가 - 일요일 새벽 2시
윤석이 방에서 창을 열고 밖을 보고 있었다.
각시는 잠이 오지 않는지 20분 전에 나갔다.
그때 창 밖에서 각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귀를 기울였으나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있다가 현관문 소리가 들리더니 각시가 들어오면서 '윤석이 왔다'고 한다.
방을 나서니 굽신 하면서 '죄송합니다.' 한다.
아무소리 않고 씻으라고 들여보내고 라면 물을 올렸다.
각시가 와서 밥이 있으니 된장 덥히면 된다고 하였으나, 그냥 라면 하나 끓여 주고싶었다.
한참을 씻던 아이가 나왔다.
라면 먹으라고 했더니, 좀 전에 라면을 사먹어서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이런.......영화에서는 이 장면 뒤에 라면 냄비 위에 후회의 눈물을 뚝뚝 흘리고 하던데...)
불러서 앞에 앉혔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제밤 어디서 잤냐고 물으니, 양천공원 화장실에서 잤다고 했다. (찌질한 녀석 같으니...)
앞으로 PC방에 가지말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답을 했다.
정 게임을 하고 싶으면 집에서 엄마에게 하겠다고 말을 하고 하라고,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고 하라고 했다.
다만, 게임할 시간은 스스로 먼저 여유시간을 만든 다음 했으면 좋겠다고 그리 하겠냐고 했더니 그리 하겠다고 한다.
집 나간 문제나 게임방 출입문제는 혼을 내고 넘어가야겠다고 했다.
자고 있는 경욱이를 깨워 오라고 시켰다.
자다 끌려나온 경욱이와 윤석이는 등산지팡이로 허벅지를 맞았다.
경욱이는 5대, 윤석이는 10대를 맞았다.
두 녀석 모두 충실하게 맞았지만 때리는 내 손힘은 예전보다 많이 약해졌다.
# 에필로그 - OO아!, 모든 것을 용서할테니 집으로 돌아오너라.
아이 가출사건에서 아이 찾는 가장 흔한 문구가 "모든 것을 용서할테니 돌아오기만 해라"이다.
참 허접해보이고 싼티나는 저 문장이 가출아이 부모의 마음을 가장 간결하고도 적절하게 표현한 명문임을 느꼈다.
제갈공명의 후출사표나, 유시민의 상고이유서나, 프랑스의 인권선언문도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관련자(?)의 마음을 꿰뚫지는 못할 것이다.
쉽지는 않겠자만 욕심을 버려야 겠다.
각시에게도 아이에게 간섭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과학학원선생님을 각시와 함께 아이진로 등에 관하여 면담을 했다.
40 초반의 여선생님이었는데, 상황을 다 듣더니 간결하게 한마디 했다.
"짜식,찌질하게 화장실이 다 뭐야~"
아이 아버지로서 참으로 많이 쪽팔렸다.
# Tip - 아이가출시 참고사항
1. T머니나 후불교통카드는 인터넷으로 조회하면 사용내역을 구체적으로 확인가능하다. 승차일자와 승차한 정류장, 하차한 정류장 등
2. 자발적 가출은 경찰신고하면 쪽팔리기만 하더라. 신중하게 생각해라.(원인미상 미귀가는 신고가 중요함)
3. 대부분 집 주변에서 '발견해 주길 기대'하면서 배회할 것이다.
4. 대형마트에서 식사해결할 가능성이 있고,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윤석이는 대형마트에 갈 차비가 없어서 가지 않았으며, 대형서점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5. 주변 친구에거 함부로 이야기하면 쪽팔려서 진짜 가출할 수 있다.
6. 부모나 친지에게 일없어 소문내지 마라. 아이는 쪽팔림, 가족은 대책없는 염려만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