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일이다.
그러니까 열 아홉되던 해 겨울이었으니까, 22년이 지난 일이다.
어제 지하철에서 신영복 교수의 수필을 읽다가 문득 생각난 사람이 있다.
내 인생에 특별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니고, 보통의 영향을 끼친 사람도 아니고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러니까 그냥 살아오면서 만난 약간 특이한 사람 중 한명이고, 아직도 그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간다.
그때 대구에서 고등학교 3학년 생활을 하던 때였고, 아마도 학력고사를 치룬 이후였을 것이다.
부산에 있는 큰형을 방문하러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동대구 역에서 무궁화호를 탔었는데, 지금도 그렇듯이 그때도 여행을 하는 내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을 것이고, 나는 타자마자 옆 자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책을 보았을 것이다.
만일 옆 자리에 묘령의 아가씨(그때는 여고생이었을 것이다)가 있었다면 몇 번 힐끔거렸거나 아니면 구차한 이야기 빌미를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옆 자리에 20대 중후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기에 그냥 타자마자 책부터 펼쳤다.
그렇게 책을 보고 한참이나 가는데 밀양쯤을 지날 때 옆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부산까지 가?”
“네.”
그때 난 그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는 20대 중후반으로 보였고, 그 당시 유행하던 장발머리에다 허름한 캐주얼 복장을 하고 있는 그야말로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목소리는 외모보다 따스해보였고 그래서 약간 의외라는 느낌으로 그를 보았던 것 같다.
그러더니 그가 불쑥 밀감을 몇 알 건네주면서 먹으라고 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짜라면 양잿물이나 청산가리도 일단은 받아두고 보는 성격이었는데, 먹는 거라니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더구나 귀한 밀감이길래 감사의 표시를 하고 낼름 받아먹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책을 덮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산까지 갔다.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에 나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다만 그가 인생의 선배로서 나름대로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는 기억만 남는다.
그렇게 부산에 도착하자 그는 바쁘지 않다면 저녁을 사주고 싶다면서 부산역 2층에 있는 양식집으로 가자고 권했고, 그 또한 공짜였기에 나는 그를 따라서 내 생애 최초로 근사한 돈까스란 음식을 먹게 되었다.
스프도 그때 처음 먹었고, 맥주도 반잔 가량 나누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같이 걸어 나오면서 ‘바쁘지 않다면 자기가 사는 집에 잠깐 놀다 가라’고 권했다.
그 말에 처음으로 망설여졌다.
사실 바쁜 건 전혀 없었지만 생면부지의, 더구나 특별한 이유도 없는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집에 덜렁 초대받는다는 것이 이상했고, 그 초대를 받아들인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데 나는 그 초대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러자고 하면서 같이 버스를 탔다.
그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한 것은 내가 별로 바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했고, 그가 베푼 처음고 두 번째의 호의를 이미 받아 들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초대를 거절할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20분 정도 타고 지금은 전혀 기억에 없는 부산의 어느 산동네에 도착을 했고, 다 쓰러져가는 판자 집 앞에 도착을 하자 그의 초대를 수락한 것이 무척이나 후회되었지만 그렇다고 돌아설 명분이 없었기에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홀아비 냄새와 담배냄새가 찌들어 있었고, 윗목에는 라면 냄비가 씻지도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왜 나를 그 방으로 초대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방안에 앉은 나의 표정의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내심은 후회막급, 좌불안석이었고 일종의 공포심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나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가 무엇인지, 나를 산동네로 데리고 온 목적이 무엇인지가 궁금했고, 모든 지식을 다 짜내어 추리를 하고 있었다.
‘사람을 납치해서 멸치잡이 배로 팔아넘기는 사람도 있다던데.....’
‘남자를 좋아하는 변태도 있다던데......’
‘에이, 그냥 내가 친한 동생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거야...’
‘내가 여기서 실종이 되면 가족들은 나를 찾을 단서가 하나도 없을텐데....’
그런 불안한 심정으로 앉아서 밀감을 몇 개 주워먹고 있기를 10여분, 그가 일어나더니 전화하고 오겠다면서 잠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 자리를 피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면서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오늘 정말 감사했다고...’ 이야기를 했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별 다른 표정없이 웃으면서 잘 가라고 하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 주겠다면서 되돌아섰다.
그리고 자기의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주면서 언제 다시 부산에 오면 연락을 달라고 하였고 나는 선선히 그러겠노라고 답변을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아무런 일도 없이 그 동네를 떠났다.
그게 그 사람과의 인연의 전부이다.
이 이야기의 전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왜 내게 그러한 호의를 베풀고, 초대를 하였는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가 설명하지도 않았기에 아직도 모른다.
그때, 사람을 참 쉽게 믿었던 것 같다.
만일 지금에 와서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처음부터 그 호의를 거절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남에게 이유없는 호의를 베푸는 것이 점점 줄어들면서 남들도 나에게 이유없이 호의를 베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왜 그랬을까요?
2006. 7. 11 맑은날
'기억의 책갈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김윤아 - 봄이 오면 (0) | 2007.02.08 |
---|---|
애벌레와 나비 (0) | 2007.01.15 |
달집태우기 (0) | 2005.02.23 |
바리깡 이야기 <바리깡> (0) | 2004.09.07 |
이곳에는.. (0) | 2004.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