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나서서 지하철 역까지 걷는 8분 가량의 거리가 하루 중 가장 상쾌한 시간일터이다.

바람이 달력을 보고 있었을리야 없겠지만 9월이 들자마자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이 달랐다.

특히 오늘 아침에는 뽀송뽀송한 바람이 반소매 옷깃 사리로 시원하게 헤집고 들어와서 상쾌한 하루를 예감케 했다.

요즘 보고 있는 책을 사무실에 두고 퇴근해서 지하철 입구에서 무료신문을 하나 주워들고 지하철을 탔다.

좋은 일은 연거푸 생기나보다.

마침 자리가 하나 비어있었고,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덩치도 작은 편이어서 어깨를 움츠릴 필요없이 편안하게 앉아서 신문을 펼쳤다.

지하철신문답게 7분 정도만에 신문을 다 보고나니, 딱히 할 일이 없어 다시 한번 뒤적이는데, 앞 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자꾸 쳐다보는 듯 했다.

신문을 무릎에 놓고 쳐다보니 깍두기 한 명이 힐끔거리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놈 참 부지런하기도 하구만..........’


사실 깍두기들 세계에서 아침 7시 30분이면 한밤중이다.

그런데 그런 시간에 지하철을 타다니.....

뭔가 묘한 놈이다 싶어 나도 몇 번을 힐끔거리면서 얻은 결론은...‘별 볼일 없는 깍두기다’로 단정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놈이 뭔가를 말하려는 눈빛으로 자꾸 쳐다보는 게 신경쓰였다.

얼굴에 기운 자국이 있고, 굵은 팔뚝으로 팔짱을 끼고 그리고 짧은 다리를 기계체조하듯이 한껏 벌린 상태...전형적인 깍두기의 지하철 앉은 자세로 말이다.

목에는 도금인지 순금인지 모를 체인을 감고, 검은 골프바지를 입고서 말이다.


자꾸 걸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다시 신문을 훑어보다가 내릴 역이 다 되었다.

신문을 말아쥐고 일어서는데 깍두기도 함께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신경쓰이는 것을 무시하고(사실 좀 떨렸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이른 아침에 지하철에서 깍두기가 난동을 부렸다는 기사는 체크되지 않았다) 지하철을 내려서 계단으로 가는데 깍두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저기요~”


“왜~요오?” ( ‘이른 아침부터 삐끼질인가??’ )


깍두기가 좀 더 다가와서 조용하게 속삭인다.


“바지 지퍼가 열렸어요.”


“..............................”



왠지 깍두기 옆에 있던 아가씨도 자꾸 쳐다보더라니............



가을이 되니 하늘이 저만치 올라갔다.

그 하늘 따라 내 마음도 올라가버렸나보다.

정신을 차려야지.........

^_______________^;



2004. 9. 3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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