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이란 친구가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인데, 그 당시에 별로 친하지 않았고, 중학교 때는 그런 친구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냈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리고 고등힉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오늘까지 연락한 적이 없고, 아마 내일도 연락할 일이 없을 것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어디선가 미술선생님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렇게 별 친하지도 않은 친구이야기를 뜬금없이 왜 꺼내느냐고 의문을 품지는 마시라.

나도 모르니까....

하여튼 그렇게 별 친하지 않은 친구와 있었던 작은 일 하나가 생각나서 이야기해본다.

일이라기 보다는 사례, 케이스, 경우 따위라고 보는 편이 낫다.

어떤 사례,경우, 케이스냐 하면, "궁색스러운 답변"에 대한 것이다.


살면서 답변할 말이 없어 대답이 옹색스러운 경우가 더러 있다.

정치하는 양반들은 그런 경우가 꽤나 자주 있겠지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은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다.


그러니까 그때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인생이 허풍스럽고, 지금도 허풍스럽게 잘 살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당시 라면과 소주와 담배에 대한 탐구생활을 함께 하곤 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주덕이에게 놀러 가자고 했다.

주덕이가 사는 자취방에 가서 몇 년 만의 해후에 서로 감격하는 척 한 다음, 담배나 피우며 뒹굴거리다가 갑자기 주덕이가 삼빡한 제안을 하나 했다.

자기 여자친구(그냥 아는 사이)가 자취하는 방에 놀러 가자는 놀라운 제안이었다.

그 친구 제안에 따르면 멀지 않은 곳에 자취하는 여자친구가 있는데 그 곳에 가서 좀 놀다가 여자친구의 친구를 불러내어서 같이 놀자는 것이었다.

고맙기도 해라...

즉시 반짝이는 눈빛으로 셋이서 가까이 있던 여자친구의 집으로 갔다.

오후 서너시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좀 추운 날씨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주의사항을 들려주었는데, 여자친구의 집 주인 할머니가 무서우니 조심하라고 했다.

골목을 몇 번 돌아서 어떤 양옥집 앞에 드디어 섰다.

주덕이가 대문을 살그머니 밀어보더니, 잠겼다고 그랬다.

그러면서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더니 용기를 내어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하는 소리가 나고 잠시 지나더니 대문에 달린 인터폰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왔다.

 

"눈교?" (누구십니까?)

 

그 말을 든는 순간 갑자기 주덕이가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해졌다.

나라면 할 말이 없었을테니까...

과연 뻔뻔한 주덕이는 좀 달랐다.

 

"접니더..."(저입니다.") 

 

"......"

 

"......"

 

"누구라꼬?"

 

"..........주더긴데예.."(주덕이입니다.) 

 

조마조마한 게임을 보는 심정으로 관전하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필살기를 날리신다.

 

"주더기가 눈데?"(주덕이가 누구인데?)

 

 "............."

 

궁금해 미칠뻔 했다.  과연 주덕이가 뭐하고 답변할까하는 생각에.....

 

"................."

 

주덕이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돌아서며 말했다.

 

"가자, 오늘은 안되겠다.."

 

"..................."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그때 나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특정한 목적에서 함께 모인 자리에서의 자기 소개도 아니고, 그렇다고 얼굴이나 보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에 대한 자기소개도 아니며, 자선이나 우호관계 등의 공익적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는 곁방에 자취를 하는 인숙이의 남자친구인데, 그렇다고 부적절하거나 깊은 관계는 아니구요, 또 당장에 그럴 가능성도 없구요, 아주 간단하게 얼굴이나 보면서 친목을 잠깐만 다지고 나갈 사람인데요...어찌 대문을 잠시만 열어주시면 친목관계를 증진할까 합니다. 물론 고성방가나 풍기문란 등은 일절 없을 것을 보장드립니다만....."

 

이라고 해야하나?

                                                                                                        2010. 5. 3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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