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향기나는 사람

사람을 후각적으로 분류하자면 3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먼저 냄새나는 사람이다.

여의도에 가면 주로 많이 볼 수 있는 부류인데, 후각적으로 예민하지 않으면 그 냄새를 향기로 오해할 수도 있다.

두번째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번째 부류에 해당하는데 이를 범인, 필부, 선남선녀라고 부른다.

적당하게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때때로 향기도 나는데 이러한 후각적 효과를 합치면 무취가 되어 냄새없는 사람이 된다.

마지막으로 향기나는 사람이 있다.

그 생각이 올곧고, 그 생각을 실천하고, 주변사람에게 그의 향기로 스스로 반성케하거나 각성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종교인, 교수,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었으나, 정보화, 도시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거의 멸종위기를 맞고 있어 요즘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보기란 정말 쉽잖은 일이 되었다.

 

 

 

 

2. 김제동의 강연을 듣는 행운

이렇듯 귀하디 귀한 향기나는 사람의 강연정보를 듣고 꼭 만나고 싶어 욕심을 내었다.

코오롱스포츠 아웃도어클래스

코오롱스포츠 아웃도어클래스

논현동에 있는 코오롱스포츠(http://www.kolonsport.com) 컬쳐스테이션에서 11월 16일 "김제동이 전하는 아웃도어이야기"라는 제하로 김제동의 강연이 그것이었다.

불법까지는 아니지만 양심에 찔리는 약간의 편법으로 코오롱스포츠아웃도어클래스라는 카페의 회원을 상대로 하는 강연초대 추첨에 응모하여 당첨이 된 것이었다.

김제동을 향기나는 사람으로 분류한 내 판단이 맞는지, 그리고 맞다면 그 향기가 어떠한지, 그리고 연예인으로서 감내할 수 밖에 없는 불이익을 알면서 향기로운 사람의 길을 선택한 그를 참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약간의 편법(추첨 전날 카페회원가입한 것을 말함)을 사용한 이유였다.

 

3. 그를 만나기 전

강연을 들으러 간다고 조금 일찍 퇴근하니 직장동료 2명이 부러운 시선으로 자신의 명함을 주면서 뒷면에 싸인을 좀 받아달라고 했다.

직원들의 명함과 아이들 사진 1장과 김제동이 공저한 책 1권을 준비해서 강연장에 도착했다.

저녁 7시 30분부터였는데 조금 이른 시간이라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강연장에 15분 전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앞 자리는 다 차지하고 남은 자리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코오롱스포츠아웃도어클래스의 카페쥔장인 박OO대리, 삼남길에서 만난 석OO씨가 있어 반가운 얼굴이 안부를 나누고 초대된 인원을 물어보니 모두 30명이란다.

구석진 자리에 앉으니 테이블에 과일과 음료수, 빵이 놓여있고, 각자의 몫으로 샌드위치가 도시락모양으로 포장되어 놓여 있었다.

시간에 맞춰서 김제동씨가 소개되고 강연을 위하여 들어섰다.

 

4. 그의 첫 느낌

그를 만난 첫 느낌은..참 작고 왜소하고 소박했으며 걸음걸이에 예의를 담고 걷는다는 느낌..

물론 걸음걸이에 예의를 담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라면 쉽잖은 일이나, 그런 류의 느낌은 문자 그대로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해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쨋거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느낌에는 인기인 특유의 늑장이나 지각이 아니었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연이어 시작된 1시간 30분 정도의 강연은 그야말로 물흐르듯, 아침이면 해가 뜨듯 그렇게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갔고, 2-3분마다 미소나 폭소를 이끌어 내는 강연이었다.

웃음을 이끌어내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품격이 있었으며 강연 도중에 언뜻 언뜻 보이는 해박한 지식은 그의 독서량을 짐작하게 했고, 사물에 대한 그의 의견에는 진지한 성찰이 담겨있어 좋았다.

 

 

 

5. 그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

연예인중에서 등산매니아로 알려진 대로 자연(自然)을 좋아한다는 그는 특히 산이 좋다고 했다.

강이나 바다는 그 끝을 볼 수 없지만 산은 정상에 오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산 전도사가 되어서 헬스클럽 러닝머신에서 다람쥐쳇바퀴처럼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허무한 운동을 하는 동료연예인 수 십 명을 산으로 포섭을 했다고 했다.

그가 산을 오르게 된 계기는 '우울증'때문이라고 했다.

원래 우울하게 태어나서 우울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그는 언젠가 정신과를 찾았고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삼각산을 찾았는데 사모바위에 올라서 그 정상에 나무와 풀과 바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산을 오르는 것을 '업힌다'라고 했다.

할아버지 등에 업힌다고 하지 할아버지 등을 오른다거나 등을 탄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느냐면서...

그 말에서 그의 산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었다.

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의 자격으로 산에 의지하고 산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이 사회를 칼날같은 경쟁사회라고 했다. 

예전 농경시대의 경쟁대상은 자기마을이었고 확대해도 이웃마을이었으니 경쟁대상이 별로 없어 경쟁의 필요성이 없었고 약간의 노력만으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을 비롯한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개개인의 경쟁상대는 전세계인이 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스타의 생명도 촛불과 같이 금새 사그라들게 된다고 했다.

예전의 미모경쟁에서는 기껏해야 자기마을과 이웃마을에 사는 또래가 비교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장소적으로는 전국민 나아가서는 전 세계인이 비교대상이 되고, 시간적으로는 현재는 물론 과거의 사람들 모두가 비교대상이 되면서 성처받고 좌절하고 우울해질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사람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사람에게서 위안받기 힘든 법..

그래서 비교당하지 않는 자연으로 간다고 했다.

말없이 위안주는 존재가 신(神),술(酒), 산(山) 3가지인데 그는 일주일에 5일 정도는 산에 업힌다고 그랬다.

산은 속임이 없고 반칙도 없이 정직해서 자신의 걸음걸이만큼 자신을 높이 올려준다고 해서 좋다고 했다.

 

6. 누구랑 함께 산에 업히는 것이 좋은가

- 사람이 입을 열면 입을 다물고 있을 때보다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가 인용한 인도속담이란다.(세상에~ 북한속담도 아니고 일본이나 중국속담도 아닌 인도 속담이라니..^^)

자신이 입담으로 먹고 살지만 사람이 침묵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사람이 가치를 가지려면 침묵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한다.

그가 입담으로 먹고 살기에 그 말이 더욱 절실히 와닿았는가 보다.

그래서 산에는 혼자 가는 것이 완전히 자연에 업힐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산행이라고 했다.

다만 높은 산이나 위험한 구간 또는 통산장애구역을 가는 경우에는 미리 지인에게 연락해서 행선지를 알려주고 가야 한다는 친절을 마지막에 덧붙였다.

 

7.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그는 또 폭소를 유발했다.

엄동설한에 특별히 높은 산이 아니라면 비싸고 좋은 기능성 옷을 굳이 입을 필요는 없다면서 그냥 편하게 옷을 입고 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다만 굳이 옷을 사려면 코오롱스포츠의 옷이 좋다고 했다. (이 대목 폭소)

서울 인근산을 오르면서 복장을 다 갖추고 가는 것은 실개천을 건너면서 육상화를 신고 건너는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청계산에서 얼어죽은 등산객 못봤다면서 편하게 입고 등산했다가 굳이 얼어 죽을 거 같으면 주변사람에게 옷을 빌려 입으라면서, 그때 바로 코오롱스포츠 것을 빌려 입으면 된다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8. 기타..

그는 아마 최근에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를 읽은 듯 했다.

그 책의 맹자편에 있는 양혜왕의 '소 대신 양을 잡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독서의 폭과 깊이는 느낄 수 있었다.

그외에 산에 오르면 2번 욕을 한다는 것이나, 자신이 등산하는 연예인으로 알려지는 바람에 산에서 땀도 맘대로 못흘리고 쉬는 것도 눈치보면서 쉬어야 한다는 너스레는 모두에게 폭소를 안겨주었다.

못되게 구는 직장상사, 친해지고픈 여자나 남자, 아이들과의 산행 등에 대하여 적절한 재치를 섞어 이야기 한 것도 기억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받았을 질문인 "내려올 거 왜 구태여 올라가나?"라는 질문에 대하여는 '어차피 죽을 거 왜 태어났냐' 또는 '집에 돌아오면 벗을 옷 왜 입고 나가냐'라는 재치있는 반문을 대책으로 내세운다.

 

9. 강연을 마치고

강연 안내문에는 강연이 끝나면 청중에게 경랑다운점퍼 교환권인 상품권 5장을 퀴즈로 나누어 준다고 했다.

그는 코오롱스포츠에서 미리 내어준 문제를 읽어보고나서는 문제대로 하기에는 낯간지럽고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못하겠다면서 재치있게 양해를 구한 다음 미혼이면서 혼자온 사람, 자신처럼 억울(?)하게 생긴 사람, 결혼하지 못한 동생있는 사람, 헌혈증 가지고 있는 사람 등 고가의 상품권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부분 경품에 대한 욕심을 약간은 가지고 있었을터이지만 나름대로 필요한 사람에게 상품권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질문이나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하여 손들고 일어나서 하고픈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이를 관철하기는 쉽지 않은 세상에 김제동씨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서 많이 고맙다고...그로 인해서 힘든 것도 많겠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위로받고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아주 많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강연에 참석했다'고 말을 했다.

인사치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많이 고맙다고 그랬다.

 

 

10. 사진촬영과 싸인공세

강연을 마치고 포토타임을 가졌는데 30명의 청중과 코오롱직원들에게 둘러쌓인 그는 많이 웃고 즐거워했다.

나 역시 사진을 찍고 싸인을 1장 받을 기회를 가졌다.

직원이 부탁한 싸인은 기다리는 사람이 많고 1인에게 1장만 한다고 양해를 구하는 바람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강연을 마치고 간단한 기념품까지 챙겨주는 코오롱스포츠의 센스가 돋보였다.

 

11. 글을 마치며

그는 촌스럽다는 말을 참 좋은 칭찬으로 듣는다고 했다.

여기서 말한 촌스럽다는 말이 꾸밈이나 가식이 없이 자연스럽다라는 의미라면 그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친절, 배려, 의기, 겸손, 사양, 이해심, 멋, 해박, 재치, 기발, 예리............

어떤 이를 표현할 때 이러한 긍정적인 단어가 떠오르는대로 들어맞는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그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강연을 시작할 때는 키 작고 왜소했던 그가 강연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있었고 그 품이나 등허리도 사람 몇은 품을 만큼 넉넉해 보였다.

 

 

꼬리글

늘 가진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아웃도어상품들....많이 비싸고 따라서 회사는 돈도 잘 벌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을 사회나 고객에게 환원하는데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아웃도어브랜드와는 달리 코오롱스포츠는 수익의 상당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공익사업에 투자하거나 고객배려로 사용하는 것은 다른 브랜드와는 차이가 현격하다.

코오롱스포츠와 인연을 맺게된 약속릴레이를 비롯하여 오지탐험대, 삼남길개척, 포토트래킹, 아웃도어클래스 운영 등등....

이번 행사를 포함한 코오롱스포츠의 각종 공익사업에의 투자를 통한 수익환원  내지 고객감사정신에 대하여 큰 감사를 드리며, 세계화시대에서 애국심에 호소하기에는 어쩐지 '쩐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국산토종브랜드라는 점에 많은 애착을 가져야 겠다.

개인적으로 코오롱스포츠의 큰 고객은 아니지만(사실 경제적으로도 그럴 정도는 못된다 ^^), 기업에 대한 개인적 홍보를 통하여 코오롱스포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쭈~~~~~욱~~~~~~~~~~~~~~ ^^ 

 

                                                                            2010. 11. 17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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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워킹] 대한민국서 가장 걷기 편한 1천리 `삼남길`
해남 - 강진 - 나주 - 광주 - 완주 - 익산 - 논산 - 공주 - 천안 - 평택 - 수원 - 남태령 - 남대문
  

■매일경제ㆍ코오롱스포츠 공동 기획


매일경제신문이 코오롱스포츠(kolonsport.co.kr), 로드 플래너(road planner) 손성일 대장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걷기 편한 `길`을 만듭니다. 바로 `삼남길`입니다. 이 길은 한반도 동맥과 같은 길입니다. 조선시대엔 군사는 물론 진상품이 이동한 경로였고,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위해 선조들이 한양으로 간 길 역시 다름 아닌 이 길입니다. 무엇보다 의미가 깊은 건 이 길이 `수평`이라는 점입니다. 모름지기 길은 편해야 합니다. 수직을 지향하는 등산로나 목표 지점을 정하고 가는 트레킹 코스와는 그래서 다릅니다.


전남 해남에서 시작되는 이 삼남길은 강진, 나주, 광주, 전북 완주, 익산, 충남 논산, 공주, 천안, 경기 평택, 수원, 서울 남태령, 남대문까지 1000리가 이어집니다. 아마 한반도에서 가장 길고, 느리면서, 편한 길로 남을 것입니다. 첫 스타트는 대한민국 만화계 대부인 이현세 화백과 함께했습니다. 느리면서 편한 아날로그식 삼남길과 만화라,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시는지요. 자 그럼 출발합니다. 서둘지 마시고 느리게, 편하게, 천천히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이현세 화백과 함께 길을 떠나다


◆ "느리고 수평적인 길이라. 거 좋다"


이현세 화백(가운데)과 함께 로드매니저 손성일 대장(왼쪽), 신익수 기자가 삼남길 쌍령고개 구간을 느릿느릿 걷고 있다. 구불구불 쌍령 정상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늘 숲의 생기가 넘치는 삼남길 "생동"의 구간이다. <이충우 기자>

 

 

지난 13일 천안시 인근 쌍령고개. 나뭇가지를 장난스럽게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이현세 씨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기자는 안다. 전날 술과 함께 달렸음을. 대한민국 만화계 지존 이현세. 그는 `음주계 지존`이기도 하다. 폭탄주 20잔을 먹고도 끄떡없다. 스스로도 "주량이란 게 있어? 필름 끊어져 봤어야지" 하고 능청을 떤다.


요즘 이현세 씨 명함은 무려 4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애니메이션ㆍ드라마 제작자가 하나.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직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영원한 `화백`이라는 직함. 천하의 이현세라도 바쁜 삶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느리고, 편하면서, 천천히 갈 수 있는 삼남길 취재에 함께하자는 유혹에, 휴대폰까지 던져둔 채 기꺼이 동행했으리라. "이런 멋진 길을 가는 데 휴대폰은 잠시 꺼둬야 한다"며 능청스럽게 호기까지 부리신다(술에 만취해 깜빡 잊고 화실에 두고 온 게 뒤늦게 밝혀졌다).


삼남길은 한반도의 동맥 같은 길이다. 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진, 나주, 광주, 전북 완주, 익산, 충남 논산, 공주, 천안, 경기 평택, 수원, 서울 남태령,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1000리 길이다. 진상품도, 군사도, 사신도, 관료들도, 과거를 보러 갔던 선비들도, 심지어 유배자들까지 모두 이 길로 다녔다고 한다.


이현세 씨와 함께 잡은 첫 답사 코스는 쌍령고개.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IC에서 빠지면 23번 국도로 이어진다. 이 도로를 따라 5분쯤 달리면 차령터널. 바로 이 앞에서 35번 구도로로 접어들면 다시 쌍령고개로 이어지는 옛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심에선 이제 보기조차 힘들어진 흙길. 폭 2m 남짓한 길을 따라 양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소나무가 흙길과 함께 절경을 만들어낸다.


◆"쌍령고개…이 길은 귀한 길이지"


"차령이 수레나 우마차가 다닌 큰길이라면 쌍령은 그야말로 서민들 길이었지. 차령터널이 뚫리면서 쌍령은 더 소외를 받았는데, 그 덕에 옛길의 정취를 고스란히 갖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야."


타박타박. 아스팔트가 딱딱한 겉옷을 입은 지구 표피라면 흙길은 맨살이다. 그러니 리듬이 있다. 그 맨살의 굴곡을 따라 생기가 그대로 발바닥에 전해진다.


사실 이현세는 걷기 예찬론자다. 지금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닌다(물론 술 취했을 때만). 골프를 할 때도 카트를 멀리한다. 티샷을 한 뒤엔 아예 뛰기도 한다. 물론 그가 즐기는 건 등산이 아니다. 트레킹도 아니다. 등산과 트레킹이 수직적이라면 이현세식 걷기는 수평적이다.


"모름지기 걷기란 편해야 하거든. 걸으면서 힘든 것, 그것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잖아. 트레일 알지? 가볍게 오솔길을 걷는 듯이 걸을 수 있는 코스. 거기에 딱 알맞은 코스가 바로 이 삼남길인 것 같네."


수평적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삼남길이 수평을 지향하는 트레일 코스긴 해도 고개는 고개다. 게다가 차령고개를 둘러가는 코스보다 20리가 짧다는 지름길이 쌍령이다. 어느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질문조차 꺼내기 힘들어 하는 기자에게 이 화백이 되레 묻는다. 걷기의 매력이 뭔지 아느냐고. 글쎄다. 이렇게 힘든 게 매력일 리는 없는데….


"걷기는 그 마을, 그 지역의 속살을 볼 수 있잖아"


"등산이나 관광은 점과 점의 여행이잖아. 각 점을 찍고 오는 게 목적일 수밖에 없지. 걷기는 달라. 선의 여행이거든. 그냥 줄줄 다니면서 구석구석 다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러고 보니 만화와 길은 닮은 구석이 많다. 기자에겐 만화가 시각적 매체일 뿐 아니라 촉각적 매체다. 종이를 만지고 또 넘기면서 인쇄된 활자의 스토리는 색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 TV나 영화에선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느낌이다. 길 역시 마찬가지다. `촉각`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 만화에 `손길`이 끊기면 그 만화는 죽은 만화다. 길도 그렇다. 사랑을 해줘야, 밟아주고 다져줘야 그 길은 생명을 이어가게 된다.


삼남길은 통일을 염두에 둔 길이라는 설명을 하자 이 화백 입이 쩍 벌어진다. 서울까지 이어진 이 길은 의주대로를 따라 신의주를 거쳐 중국과 유럽까지 뻗어 간다. 걸어서 가는 `아시안 하이웨이`인 셈이다.


삼남길이야 그렇다 치고 `영원한 화백` 이현세는 어떤 길로 가게 될까. 싱긋 웃더니 `70세가 되면 동화 들려주는 할아버지 작가`가 되고 싶단다. 세계적인 동화를 이현세식으로 해석해 만화를 접목한 하이브리드 장르를 만들어 보겠다는 구상이다.


어째, 가장 한국적인 길인 삼남길로 걸어서 가는 아시안 하이웨이를 만들겠다는 구상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럴 것이다. 인생의 길이건, 바닥에 깔린 길이건 세상 모든 길은 결국 통하게 마련이니까.


■ 삼남대로 그리고 트레일


 `트레일 워킹(trailwalking)`은 가벼운 걷기다. 산을 오르는 `트레킹`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트레일의 원래 뜻이 그렇다. 사람들이 오가는 자연의 오솔길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수직적 높이를 추구하는 `등산`과도 다르다. 수평적이면서 평화적이다.


요즘 대세는 트레일이다. 뻔한 걷기에 지쳤고, 등산에 부담을 느끼는 레저족이 가세하면서 트레일 인구는 급속히 늘고 있다. 등산보다 체력 소모도 작아 실버 세대도 편하게 즐긴다. 트레일 코스도 늘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에 이어 서울 성곽길 등 해마다 증가세를 타고 있다.


삼남대로는 트레일 워킹을 위한 길이다. 코스는 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진, 나주, 광주, 전북 완주, 익산, 충남 논산, 공주, 천안, 경기 평택, 수원, 서울 남태령,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1000리 길이다. 삼남대로 시발지는 제주로 이어지는 땅끝 지점인 전남 해남땅 관두포항과 강진 마량항이다.


이 길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용도는 군사길이다. 이 길을 통해 관리들을 임지로 파견하고 군사도 이동시켰다고 한다. 진상품도 이 길을 따라 이동했고,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위해 한양으로 간 길 역시 삼남길이다. 이 길은 아픔의 길이기도 하다. 중앙관리가 제주도 유배지로 귀양을 갈 때도, 임진왜란 때는 왜구들 역시 침략을 위한 요로로 이 길을 이용한다. 현재 삼남길은 해남 땅끝 탑에서 시작해 강진 누릿재 구간까지 90㎞가 조성돼 있다. 해남에서 서울까지 삼남길이 완성되면 500㎞에 달하는 대한민국 최대 장거리 도보길이 완성된다.


[신익수 여행·레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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