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義士)
사전에서 찾아보면 '의협심있고 절의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 '떠그럴...의사보다, 의협심, 절의란 말이 더 어렵네.'
- 길 건너에 있는 목적지 물어보니 2키로미터 가서 유턴해오라는 멍청한 네비게이션같으니라구...
이런 경우에 어떤 사람이 의사(義士)로 추앙받는지 살펴보면 이해가 더 빠르다.
의사(義士)라 하면 금방 떠오르는 사람은 안중근과 윤봉길, 이봉창 이런 분들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행위에 분연히 항거하여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하고, 홍구공원 일본군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쾌거를 하신 분들이고 교과서에도 이분들의 의거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분들의 의거(義擧)로 말미암아 일본군의 전력이 약회되었거나, 일본이 패주하였거나, 일본이 조선인을 겁을 내어 식민정책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실 없었다.
그렇다고 이를 계기로 전 조선인이 일본에 항거하여 들고 일어난 일도 또한 없었다.
실질적으로 당시 일본제국주의 팽창정책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이분들의 의거를 폄훼하고자 하는 의미가 아님은 모두 아시리라 믿는다.)
그럼 무엇이 남는가?
이분들의 의거로 일제의 침략에 억눌리고 분노했던 우리 민족의 가슴을 시원하게 한 것이 가장 큰 것이다.
가령 전철 안에서 행패를 부리는 양아치가 있었으나 겁도나고 맞을까봐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는데 승객 중 누군가가 일어서서 그 놈을 응징하거나 적어도 달려들어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그 얼마나 속이 후련한다.
역시 겉으로는 하지 못하고 맘 속으로 힘껏 박수를 치며 격려하는 마음이 생기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 또한 앞으로 유사상황이 생길 경우 같은 행동을 할 용기를 북돋우기도 한다.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의사(義士)와 의거(義擧)의 핵심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오늘 새벽 대구시 동구 신천동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린 이름모를 의사(義士)의 의거(義擧)를 오래 그리고 높이 기리고자 함에 있다.
염천지절에 됨에 따라 밤이 되면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게 되는데 대구는 덥다보니 6월 초부터 창을 열어놓고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쉬 잠 들기 어렵고, 지쳐 늦은 잠이 들더라도 새벽에 꼭 잠을 깨게 되어 그로 인하여 하루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우리 동네의 지번모를 어느 집에서 성별모를 어떤 사람이 역시 성별과 품종모를 어떤 덩치 큰 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일체불상의 개가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그리고 새벽 5시부터 아침 7시까지 우렁찬 목소리로 쉴 새없이 짖는다는데 있었다.
처음 일주일은 '나만 예민한가', '바로 옆집이나 개주인은 견디는데 적어도 수백미터는 족히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내가 호들갑 스러운가보다'고 생각하며 적응하려고 무지 애를 썼다.
그런데 갈수록 짖는 소리의 데시벨은 올라갔고 중단없는 짖음은 계속되었다.
새로 이사와서 개가 적응을 하느라 그런가 보다며 일주일을 더 참았으나 차이가 없었다.
2주일이 지난 어느날 아침 잠을 설쳐서 퀭한 눈으로 일삼아 걸어서 출근하는 길이었다.
그 개짖는 소리가 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개소리가 들리면 주인에게 젊잖게 부탁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7시가 넘어서인지 쥐죽은 듯 조용하고 한적한 것이었다.
불상의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면 금방 알아볼 텐데 골목에 한참을 서있어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개 짖는 소리를 유인하려고 골목길 가운데 서서 "멍멍"하며 개 짖는 소리를 몇 번 내었지만 대답은 없고 대신 지나가던 아줌마 한 분이 미친 넘 보듯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물릴까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내 주변을 피하여 반원을 그리며 돌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놈도 밤새도록 짖으며 잠을 설쳤으니 아침이 되어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아..정말 나쁜 개...
그렇게 피곤한 나날을 보낸지 한 달이 지났다.
역시 어제 밤에도 우렁차고 청아한 목소리로 밤 11시임을 알리며 새벽 2시까지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불러 재꼈다.
힘들게 겨우 겨우 잠이 들었다가 다시 개소리에 잠이 깨면서 시계를 보니 5시 20분이다.
비몽사몽간에 저 녀석의 주인은 어떤 인간일까 생각하면서 방성구라도 좀 씌우면 안되나, 성대수술을 받게하면 좋을 텐데, 집주인에게 이야기해서 이사라도 해버릴까, 나처럼 잠이 깨어 스트레스받는 사람은 또 없을까 등 갖은 상념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짙은 먹구름을 뚫고 찬연히 햇살이 비치듯이,
뻘에 뿌리박고 흙탕물에 자랐지만 어느날 문득 청아한 수련이 피어나듯이,
석달 열흘의 긴 가뭄 끝에 우렁찬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개 소리 이외에 아무 소리없는 새벽의 정적과,
꿍시렁거리며 행동할 줄 모르는 비겁과 위선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그 동안의 울분과 수면부족의 억눌림을 목소리 가득 담아 개 소리 이외에 아무 소리없는 새벽의 정적을 깨치는 우렁찬 일갈(一喝)이 들려왔다.
"야이 씨발 놈아! 잠 좀 자자~~~~. 개~애~~ 쫌 치워라~~~~~~~"
(당시의 데시벨을 글씨 크기로 표현하자면 40pt는 되어야 하나 화면 구성상 보기 좋지 않아 12pt, 볼드체로만 표시하였다)
아!
욕설이 그렇게 아름답게 들린 적은 없었다.
새벽에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큰 소리가 그렇게 달콤한 적은 또 없었다.
그 이후 주변에 가득 흐르는 정적이 그렇게 숙연한 적 또한 없었다.
오늘 새벽은 내가 분명히 하얼빈 역에 있었고, 홍구공원에 있었다.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은 분명해 졌다.
선열의 의기로운 발자취를 따라 한층 더 높은 데시벨로, 한층 가다듬고 정제된 욕설로 무장하여
신새벽의 비겁을 뚫고 분연히 일어나야 할 일만 남았다.
이 글을 대구시 동구 신천동에 거주하는 이름모를 의사를 기려 犬叱義擧(개를 질책한 의거)로 명명하고 글을 바치는 바다.
2012. 7. 12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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