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을 본다.
흰 머리가 다소 우두침침한 화장실 거울에서도 몇 가닥 보인다.
피곤한, 그리고 무언가 빠져나간, 희망을 잃어버린 듯한 중년의 초췌한 사나이가 보인다.
엉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비집고 일어선 하얀 머리카락 한 가닥,
이마와 눈 가에 자리 잡힌 주름, 생기를 잃어버린 눈동자, 윤기를 잃어버린 입술, 이제 조금씩 쳐지기 시작하는 볼.........
거울 속의 나는 거울 밖의 나를 그럴 수 없다는 듯이 애처롭게 보고 있고, 거울 밖의 나 또한 거울 속의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보고 있다.
거울 밖의 내가 거울 속의 허상이고 거울 속의 내가 실체인 듯 혼란에 빠진다.
기름 때가 몇 점 보이는 넥타이, 그 넥타이가 나를 더 슬프게 한다.
그 넥타이가 '나는 당신에게 목을 매고 있으니 당신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라고 하는 것 같아서 슬프다.

며칠 전부터 오른 쪽 귀가 아프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곳에서는 전혀 이상이 없다가도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만 들리면 오른쪽 귀에서는 그 소리들이 메아리치면서 어떨 때는 개구리울음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갈밭에 개울물 흐르는 소리 같이 와글와글 거린다.
특히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욱 예민해진다.
어제는 솜을 사다가 귀를 막고 지냈다.
아픈 동안 가끔 생각한 것은 사람도 기계처럼 스위치가 달려있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귀가 피곤하면 스위치를 꺼서 소리로부터 단절시켜버리고, 보고 싶지 않는 것이 있을 때에는 아예 시력 자체를 잠시 단절한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아질 것 같았다.

동료들은 빨리 병원을 가라고 했지만, 난 가지 않았다.
병원에 가도 특별한 처방이나 진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난 원래부터 의사들을 잘 믿지 않는다.
칼로 찢어서 고름을 짜내는 것이나, 부러진 뼈를 붙이는 일이나, 터진 맹장을 꿰매는 범위에서만 그들을 믿는다.
내가 축농증이 있다거나 코감기에 걸렸다거나, 혹은 중이염을 앓고 있거나 귀를 얻어 맞았다면, 그래서 이런 증상이 있다면 벌써 지난 주에 병원에 갔을 터이다.
그런데 그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런 증상이 온 거다.
그러면 이 증상으로 의사에게 가서 나름대로 특별한 외상이나 원인증상이 없었는데 이러한 증상이 생겼으며, 귀가 아프거나 그런 증상은 없고, 주파수가 높은 소리에 견디기 힘들다는 등의 설명을 한다면, 의사는 십중팔구 무성의하게-혹은 이미 자기가 뻔히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런 소리 할 줄 알았다는 듯이- 듣는 척 하다가 별 설명함이 없이 코나 귀를 몇 번 닦아내고는 약물 처방전을 적어주고는 이틀이나 사흘 두고보자고 할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았고 하루 자고 나면 나아지려니 하며 어제 일찍 퇴근해서 잠을 잤다.
그런데 오늘은 그 증상이 더 심해졌고, 미련하다는 소리가 싫어 병원에 가 보았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려서 진찰을 받고 나왔는데, 그 경과는 예측과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다만 의사의 표정이 그나마 친절해 보였다는 게 생각과의 차이였다.
1시간 30분의 시간과 15,000원의 비용으로 들은 말은 '지어 준 약 먹고 이틀후에 다시 오시지요'였다.

지금 직원 한 명이 '고객'이라는 사람과 20분 동안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고객의 전화가 감이 안 좋은지 아니면 직원의 전화가 감이 안좋은지 악을 써대며 통화를 한다.
나는 20분 동안 고문을 받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그대로다.

며칠 전에 책 몇 권을 인터넷에서 샀는데, 어제 배달되었다.
김훈의 책 두 권, 밀란 쿤데라의 느림, 최순우의 책 한 권.........
대충 보니까 다 볼 만한 책인데 아직 표지를 열지 못했다.
귀 때문이다.

2002. 5. 28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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