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립니다.
한 여름 내 더위에 지친 물푸레나무가지와 비를 몰고 온 미풍에 언듯 흰배를 뒤집는 은사시나무 잎새에 비가 내리고,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답게 뵈던 벽오동 너른 잎새와 초록 대궁에도 빗물은 어김없이 찾아듭니다.
한 방울의 빗물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스팔트에도 비가 내렸다 좀 더 낮은 곳을 찾아서 내려갑니다.
어떤 이는 우울해하고 어떤 이는 음울해하겠지만 비가 오면 물먹은 삼베옷같이 우리네 마음의 뻣뻣함이 가시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먼 오랜 옛 적 비가 오면 사냥을 가지 못하고 동굴에 모여앉아 주린 배를 움키고 비가 긋기만을 하염없던 조상님들의 우울한 마음이 격세유전 된 탓일까요..
아마도 비에 젖는 건 몸만이 아니라 우리네 마음마저 젖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제 비가 그으면 하마 가을일겝니다.
서른 중반의 세월은 사람만 남겨놓고 저만치 앞서 가버린 듯 문득 달력에서 들여다 뵈는 세월은 참으로 빠르기만 합니다.
인간의 상상 속에서 가장 긴 시간의 단위는 겁(劫)이라고 합니다.
1겁의 인간의 햇수로 4억3천2백만년이며, 둘레가 40리(16킬로미터)되는 성(城)안에 겨자씨를 가득 넣어놓고 3년에 한 알 씩 가져가며, 그 겨자씨가 죄다 없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겨자씨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지는 겨자씨를 보지 않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그래도 옛 시조에 "겨자씨 만큼 만 보고 가소"라는 글이나, "수미산도 겨자씨에 들어있다"라는 불교 말에 미루어 볼 때, 씨알 중에 유독 작은 것을 지칭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을 겝니다.
누가 그런 성을 쌓아놓고 안에 겨자씨를 넣어놓고 그게 12억9천육백만개인지를 계산한지는 모르지만, 그런 상상을 한 인간이 경이롭기도 합니다.
붕이란 새나 곤이란 물고기를 생각한 장자만큼이나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시간개념에 서면 짧으면 겨자씨 20알, 길면 30알에 해당하는 인생사가 참 허망스럽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세상사에 초연해 질 수 있는 계기도 됩니다.
기껏 겨자씨 12알에 해당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고뇌를 하는 나의 유한성이라니..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던 2000년도 벌써 반을 훌쩍 넘겼습니다.
우리 모두 좋은 가을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영겁의 세월, 우주의 크기에 비추면 너무나 유치한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크기일지라도, 하루살이가 하루를 쪼개 생로병사를 다 이루듯이 그런 하루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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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碧梧桐)입니다.
예전부터 정원수로 심었답니다,
오동나무처럼 잎이 크나 잎자루가 유독 길고, 나무줄기의 색이 짙푸르기 때문에 푸를 벽(碧)자를 붙여서 벽오동(碧梧桐)이라고 부릅니다.
벽오동나무는 옛날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왔습니다.
즉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는데, 이 말은 봉황새가 나타나면 온 세상이 태평하게 되며, 이때 나타난 봉황새는 대나무 열매만을 먹고 벽오동나무에만 둥지를 짓고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를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벽오동 심은 뜻은
- 무명씨 -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터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만 빈 가지에 걸렸에라
2000. 8. 24 맑은날 ksg4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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